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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Apr 23. 2024

따뜻한 위로를 건네기 위해

1.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다(12)

설마 정말 이런 날이 올까 의심했는데 오고야 말았다. 처음으로 클래스 등록 의사를 밝혀온 연락을 받았을 때 최현욱은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가 마른세수를 했다. 끝까지 반신반의했는데 이로미의 말이 맞았다. 누군가는 그가 하는 일을 궁금해했고 어떻게 하면 그런 것을 만들 수 있는지 배우고 싶어 하고 있었다. 작업실의 너른 테이블에서 그런 마음으로 모인 사람들이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본 순간, 최현욱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유학 시절, 교수에게 첫 레슨을 받기 위해 활을 쥐었을 때만큼이나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그에게 뭔가를 배우겠다고 적지 않은 돈을 내고 와서 앉아있는 저들에게 뭔가를 제대로 가르쳐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그의 마음에 살짝 내려앉았다.   

   

-여기까지 왔다면 적어도 아마추어의 태도는 내려놓고 와야지.


첫 레슨 날 그의 연주를 듣자마자 최현욱을 흘긋 쳐다본 교수가 메마른 목소리로 질타했다. 


-이제 막 첫 발표회 무대에 서 본 어린아이처럼 칭찬을 기대하는 눈을 하고 있으면 곤란해.


교수로서는 긴장을 풀라고 한 말인지 몰라도 원체 소심한 최현욱을 바짝 얼어붙게 만들기에 더없이 적절한 말이었다. 긴장뿐일까, 그의 말에 녹아있는 핀잔과 따가운 지적에 그만 바짝 굳어버린 바람에 활은 뻣뻣하기 짝이 없는 음색을 만들어 냈다. 조금 나아진 연주를 기대했던 교수의 미간이 완벽하게 구겨졌다. 기억 속의 그가 늘 하던 똑같은 말을 반복하기 전에 최현욱은 가까스로 현실로 돌아와 마음을 추슬렀다.


아마추어적이지 않은 프로페셔널리즘이란 뭘까, 최현욱은 한동안 그 질문에 매달렸다.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최현욱의 의문은 깊어졌다. 자신은 그저 음악이 좋아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잘하고 싶어서 이 길에 들어섰는데 정작 눈앞에 놓인 프로의 길은 자신이 선택하고자 했던 직업철학과 자꾸만 상충했다. 마음이 꺾이는 일이 잦아지니 이것이 정말 내가 하고 싶었던 그 일인가 확신할 수 없어 주저하고 물러나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다. 지금껏 너를 어떻게 뒷바라지해 왔는데, 듣지 않아도 들리는 듯한 부모의 마음에 부딪혀가며 자신의 마음을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해도 그에게 기대를 걸고 끈기 있게 지도해 온 교수에게 자신의 고민을 솔직히 털어놓았다가 돌아올 질책과 비난을 감당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살면서 이런 갈등을 만날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일찌감치 좋아하는 일을 찾았고 그를 선택함에 있어 아무런 장애도 없었으니 앞날이 탄탄대로일 줄만 알았다. 그랬던 만큼 뜻밖의 좌절스러운 감정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지 알 리도 만무했다. 그때 그를 우울과 자책의 늪에서 건져내 준 사람이 도자기 공방의 아이작 노인이었다.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했던 상대에게서 나는 너의 헌신을 바랐는데, 하는 말을 듣고 여기서 무엇을 더 어떻게 하란 말인지 하고 망연자실해진 젊은이처럼 종종 넋을 놓던 최현욱에게 그가 심드렁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세상에 살면서 인생 항로를 한두 번쯤 틀어보지 않은 사람이 희귀한 줄 아니.

-하지만 악기를 전공하는 건 정말 엄청난 투자예요, 돈이건, 시간이건… 생각하시는 것처럼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럼, 다른 사람들은 뭐 별 볼 일 없는 일을 했어서 그때껏 했던 일들을 접고 다른 일을 선택했다니?


그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최현욱이 눈만 끔뻑거리며 아이작 노인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그가 옅게 웃었다.


-모르는 거다, 아무도. 누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그 자리에 와 있기 위해 어떤 것들을 포기했는지, 무엇을 바치며 노력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겉만 보고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번뇌의 페이지를 써 왔을지를 섣부르게 짐작 같은 걸 해선 안 되지. 


최현욱은 입을 다물고 그의 말을 곱씹었다. 다른 사람들은 별 볼 일이 없어서 그 일들을 접고…

그럴 리가 없었다. 아이작 노인만큼은 아니었어도 성인이 된 지 몇 해가 지난 최현욱도 그 정도는 알았다. 최현욱이 가만히 생각하다 물었다.


-부탁이 있는데… 말씀드려도 돼요?

-말해보려무나.

-저, 여기서 바이올린 한 번만 켜도 될까요?


덥수룩한 수염 아래 묻힌 입술이 빙그레 웃었다. 그가 눈주름을 잔뜩 잡은 채로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디 한 번 들어보자꾸나.


교수 앞에서와는 전혀 다른 기분으로, 최현욱은 홀가분하게 바이올린을 꺼내어 들고 평소 즐겨 켜던 작은 소품을 연주했다. 어머니가 좋아하셔서 종종 켰던 곡이었다. 교수가 늘 질타했던, 눈앞의 청중을 만족시켜주고 싶다는 마음을 가득 담아서. 애당초 최현욱은 위대한 예술의 사도 같은 것이 되고 싶은 적이 없었다. 그저 그가 만들어내는 선율에 듣는 사람이 즐겁고 행복해하면 그것으로 좋았다. 프로페셔널한 음악가는, 그것만으로는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잘게 떨리는 음이 한참을 공중에서 머물다가 천천히 사라지는 순간 최현욱은 긴장을 떨치지 못한 채 눈앞의 청중과 간신히 시선을 마주쳤다. 아이작 노인이 말했다.


-세상엔 장엄하고 웅장한 감동만 있는 게 아니라, 간소하고 소소한 감개도 있는 법이지. 따뜻한 위로였어. 고맙다. 


따뜻한 위로.

그 말이 가슴 깊이 들어와 박히는 순간 최현욱은 결심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그런 마음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바로 그런 것이라고.      





다음 연재부터는 챕터 2로 넘어갑니다 :) 함께해 주시는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도 최고로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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