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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Apr 30. 2024

어릴 때처럼 편안하게

2.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2)

“꺅- 늦어서 죄송합니다!”


서먹한 분위기를 일소하는 명랑한 목소리가 문간에서 짜랑짜랑하게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양손 가득 바리바리 봉투를 움켜쥔 이로미가 씩씩하게 연달아 외쳤다.


“어차피 첫날이라 분위기 썰렁할 텐데 일단 한 잔씩들 드시죠? 아이스브레이킹 용으로.”

“로미 씨, 커피 가져온 거예요?”

“넵! 원래 뭐라도 입에 하나 물고 있으면 분위기 화기애애해지는 법이잖아요? 오늘 커피는 제가 첫인사로 드리는 선물이에요!”


테이크아웃 컵을 테이블 위에 부려 놓던 이로미가 문득 가만히 웅크리고 있던 이진우를 발견하고 어어, 어어? 하는 괴상한 소리를 냈다.


“왜 그래, 로미 씨?”


깜짝 놀란 최현욱이 이로미를 돌아보았다. 이로미가 이진우가 앉아있는 자리를 손가락질하며 반갑게 외쳤다.


“접때 제가 카페 창문에 홍보지 붙일 때 자전거 멈추고 본 분, 맞죠? 맞죠! 얼굴이 눈에 익어!”


지나치게 반가워하는 이로미에 비해 이진우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소심하게 주억거렸다.     


“그랬어요?”

“네에. 와, 진짜 와줄 줄은 몰랐는데. 반가워요! 진짜 잘 오셨어요. 전 이로미예요. 건너편 카페 에스프레시브씌에서 일해요. 커피도 드시러 오세요! 저희 사장님이 내려주시는 커피는 예술이거든요.”


과연 일당백이었다. 진태하가 매번 툴툴대면서도 어디 보내기 아까워하는 인재답게 이로미가 순식간에 어색한 분위기를 활기차게 끌어올렸다.


“로미 씨가 조금 늦어서 앞에 두 분 소개를 못 들었을 테니 제가 한 번 더 얘기할게요. 이분은 대학에서 일하시는 교수님이시고, 성함은 윤소은 씨. 이쪽은 이진우 씨. 진우 씨는 아직 별다른 얘기는 안 했는데...”


최현욱은 말을 삼켰다. 뭐라고 질문해도 예, 아니오로만 대답할 것 같은 청년에게 뭐라고 말을 끌어내야 할지 암담했다. 그 자신도 그다지 외향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인간형이었음에랴. 그러나 그에게는 이로미라는 우군이 왔다.


“무슨 일 하는지 물어도 돼요?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그냥... 알바합니다. 취업은 아직...”

“그렇구나! 성실한 생활인이네요.”


질문부터 결론까지 몹시도 이로미다웠다. 최현욱은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기분으로 김은지를 건너다보며 부탁하듯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저는... 김은지라고 합니다. 면사무소에서 쭉 일했는데, 몸이 좀 아파서 휴직계를 내고 당분간 쉬기로 한 참에 이런 클래스가 열린다고 해서… 모처럼 저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해보고 싶어서 용기를 냈어요.”


평범한 인사말이었는데 윤소은의 어깨가 움찔 떨리는 것을 최현욱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 무슨 사연이라도 있기에, 궁금했지만 그저 8주간의 수업을 통해 강사와 학생으로만 만나고 또 놓아질 인연들이었기에 최현욱은 금세 윤소은의 반응을 잊었다.


“자, 그럼 소개는 이쯤 해두고, 일단 오늘 수업 진도를 나가야겠죠? 어릴 때 이후로 흙 만져보신 적 없죠? 오늘은 첫 시간이니까 흙에 대한 감각을 익혀본다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일단은요, 그냥 편하게 만져보세요. 꾹꾹 눌러도 보시고, 잡아당겨도 보시고. 질감을 충분히 느껴보세요. 친숙해질 정도로요.”


어려운 요구를 한 것도 아닌데 다들 서로의 눈치를 보며 망설였다. 물론 이로미는 예외였지만.


“어, 왜 안 하세요? 이거 되게 느낌 좋아요. 어릴 때 생각도 나고!”


재잘대는 이로미를 보는 시선들이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고마워하고, 또 누군가는 동경하듯, 혹은 막냇동생을 귀여워하는 눈길로.


“아, 진짜네요. 어릴 때 흙장난하던 생각나요. 물에 흙을 개어서…” 김은지가 먼 곳을 바라보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맞다, 정말 그랬는데.”


윤소은이 반갑게 호응하자 이로미와 이진우가 멀뚱히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이 공감하지 못하는 걸 알아차린 최현욱이 얼른 끼어들었다.


“와, 여기서 세대차이 나나요. 저는 두 분 말씀에 공감했는데.”

“그게... 저 자란 데서는 흙이 보일 만한 놀이터는 모조리 진작 우레탄으로 덮어버려서, 진짜 흙장난은 못 해 봤어요.”

“아... 하긴, 그쪽 분 연령대면 이미 아파트에서 어린 시절 보내셨겠어요.”

“네에. 저 어릴 때는 뭔가 주물럭거리고 노는 게 필요하면 클레이였거든요? 근데 이런 놀이는 사람한테 꼭 필요한 건가 봐요, 재료가 바뀌어도 어떤 세대건 꼭 있어요. 이런 놀잇감. 요즘 애들은 뭐더라, 그거... 액체괴물? 그런 걸로 놀잖아요.”


이로미가 신이 나서 떠들었다. 그러나 그 말 가운데 최현욱으로서는 외면할 수 없는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로미 씨 말대로예요. 이런 활동이 심신 안정에 굉장히 좋아요. 심리 치유적인 효과도 있고요.” 


착각이었을까, 최현욱이 그 말을 하는 순간 부유하는 듯한 시선들이 일순 닻이 내렸다고 느낀 것은.


“선생님도 어릴 때 흙장난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도예 전공하신 건가...”


김은지가 문득 궁금한 듯 물었다. 어디까지 얘기해야 하나 싶었지만 딱히 비밀로 할 만한 일도 아니기에 최현욱이 가볍게 답했다.


“아뇨, 도예는 아니고요. 바이올린을 전공했죠. 도예는 정말 우연히 시작했지만 이게 업이 되었고요.”


이미 알고 있던 이로미를 제외한 수강생들 전원의 입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그니까, 우리 선생님은 그거죠. 뭐지, 그... 소공자 같은 거. 우아- 하게 차려입고, 무대에 서는...”

“아니,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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