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화 May 03. 2024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2.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3)

이로미의 과장된 몸짓에 웃음이 터진 최현욱이 가까스로 이를 사리 물고 부정했다. 어떡할까, 조금 옛이야기를 해볼까 하고 고민하던 최현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런 이야기로 다들 조금 더 편해진다면 그것도 괜찮지 않을까.


“정말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빠르게 찾아가는 사람은 극소수가 아닐까 싶어요. 저만 해도 지금 로미 씨가 얘기하는 그런 시간을 꽤나 많이 보낸 뒤에야 이 길로 들어왔으니까요.”


느닷없이 튀어나온 진지한 이야기에 흙을 만지작거리던 사람들이 저마다 최현욱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의 색들이 모두 자신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하고 있어서 최현욱은 다시 한번 웃음을 참았다. 어서 이야기를 계속해보라는 듯 눈을 크게 벌려 뜬 이로미, 별 대단한 기복도 없이 편안하게 살아온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하며 최현욱을 의아하게 보는 김은지, 공손하게 경청하는 자세를 한 이진우, 그리고 어딘가 이해한다는 듯한 얼굴로 가만히 기다리는 눈을 한 윤소은.


“음악이 좋았고, 제 손으로 남들이 듣기 좋아하는 아름다운 선율을 뽑아낼 수 있는 것이 자랑스러웠기 때문에 바이올린을 전공하겠다고 마음먹었었어요. 어릴 때라 몰랐죠. 남들이 듣기 좋아하는 것보다는, 내가 음악으로서 전달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 게 먼저라는 걸. 인생이라는 게 선택의 연속이잖아요. 실수가 있는 게 당연하죠. 어떤 선택들은 조금씩 방향을 수정할 수도 있지만 또 어떤 것들은 아예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는 걸 꽤 오랜 시간을 들인 후에야 배웠어요.”


그냥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어쩐지 민망하고 쑥스러워져 최현욱은 손에 조금 흙을 뜯어 쥐고 그것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걸, 바이올린을 통해 이야기하기엔 이미 조금 길을 잘못 들었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새로 시작한 겁니다. 조금 더 맞는 방향으로요.”

“그게 도예였던 거네요, 선생님은?”


윤소은이었다. 최현욱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딱히 목이 메일 정도로 가슴 아픈 과거도 아니었는데 별일이었다. 정말... 그런가?

모든 선택에는 이유가 있다. 이유에는 마음이란 놈이 관여한다.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최현욱이 흙으로 빚을 수 있는 하고많은 형태 중에 그릇도, 항아리도, 그 무엇도 아닌 동물 인형을 고집하는 데도 이유가 있다. 다만 결코 그 이유를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많은 사람이 물어왔지만 적당히 둘러대고 말았다. 귀여워서요. 다른 분들이 잘 접근하지 않으니까 블루오션 같아서요. 대체로 그 정도로 대답하면 다들 납득했다. 하지만 가끔은 솔직히 말하고 싶어졌다. 사실은요, 제가 동물 인형만 줄기차게 빚는 이유는…


“선생님?”


느끼지 못했는데, 침묵이 길었던가 보았다. 이로미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괜찮느냐, 라고 묻고 싶은 것처럼 눈썹을 한껏 더 치켜떴다. 그래도 잘 아는 사람이라고 더 걱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기꺼웠다.


“옛날 생각이 좀 났네요.”

“시작할 때 사연이 많으셨나 봐요.”


윤소은이 변함없이 느긋하게 고저 없는 톤으로 말했는데도, 그 무심한 어조 어딘가에 위로하는 듯한 기색이 있었다.


“예, 좀 그런 편이죠. 그런데 사연 한둘쯤 없는 분이 어디 있겠어요.”


그 말에는 모두가 입을 다물고 제가끔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멀리 가는 시선, 갑작스레 초점을 잃은 시선, 책상 위에 바짝 붙는 시선, 시선들. 눈길 하나에도 이렇게 각자의 성격이 담긴다는 걸, 아마도 수업을 하지 않았다면 절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시선이 향하는 방향, 눈빛의 깊이에 따라 얼마나 많은 속내가 묻어 나오는지를. 


“맞아요. 저도 한 사연 하는데. 말하는 사람은 눈물 없이 말할 수 없는데 듣는 사람은 뭐 어쩌라고- 할 만한 그런 사연.”

“정말요? 너무 또랑또랑하게 야무지셔서 그런 일 전혀 없으셨을 것 같은데. 이렇게 맛있는 커피까지 준비해 오는 센스도 있으시고.”


윤소은의 반응이 기분이 좋았던지 이로미가 까르르 웃으며 조금 떼어낸 흙을 조물 거리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커피 맛이 나쁘지 않았죠? 제가 로스팅하고 내린 거예요. 참, 사장님께는 비밀로 해주세요. 안 된다고 할 게 뻔해서 몰래 해 왔어요.”

“정말요?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닌데요? 엄청 맛있어요.”


윤소은이 진지하게 칭찬하는데 옆에서 이진우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무슨 사연인데요?”


김은지가 조바심치는 얼굴로 끼어들었다. 아아, 그게요, 하고 잠깐 입맛을 다신 이로미가 최현욱을 보며 허락을 구했다.


“얘기해 드릴까요? 쌤, 얘기해도 돼요?”


흙을 조물거리던 손들이 조금씩 느려졌다. 최현욱이 가볍게 받았다.


“어차피 지금은 감각 익히느라 딱히 집중할 거리는 없으니까, 들려주면 우리야 좋죠.”


허락처럼 들리는 무엇이 떨어지자 이로미가 경쾌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에이, 그렇게 집중해서 들을 정도의 절절한 이야기 아니니까 라디오에 소개된 시트콤 같은 사연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주세요. 제가 카페에서 일하기 전에 서울에서 일했거든요. 블루기획에서요.”

“네? 거기 엄청 엘리트들만 갈 수 있는 회사 아니에요?”


가장 빠르게 반응한 것은 김은지였다. 이로미가 헤헤 웃었다.

이전 14화 어릴 때처럼 편안하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