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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May 07. 2024

나를 가장 괴롭히는 사람은

2.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4)

“엘리트가 아니어도 입사는 가능했다라는 산증인이 바로 저죠. 뭐,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엘리트 맞아요. 성격 천재.”

“그건 맞는 것 같아요. 로미 씨 성격 정말 좋은 것 같아요.”


윤소은이 빠르게 동의하자 이로미가 정색한 채 정정하고 나섰다.


“아니요, 좋은 것 같은 게 아니고 진짜로 좋아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왁자하게 웃음이 터졌다. 긴장이 여전히 덜 풀렸던 최현욱도, 시종일관 차분했던 윤소은도, 어딘가 긴장하고 있던 이진우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로미의 말에 유난히 관심을 보이던 김은지조차도. 한데 어울린 웃음소리가 잦아들 즈음에야 비로소 분위기가 느슨해졌다. 이로미가 신이 난 채 목소리를 점차 높여 갔다.


“... 그래서요, 제가 진짜 엔간하면 다 참고 받아주려고 했거든요? 우리 부장이, 승진이 코 앞이니 얼마나 본인도 스트레스가 극심했겠어요. 대자대비한 내가 다 이해한다 이거야. 응. 진짜 그러려고 했어요. 선만 안 넘었으면! 그런데 있잖아요.”


본의 아니게 여자들 틈에 끼어서 얼굴을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있던 이진우조차 흥미진진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이로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날이 금요일이었거든요? 아버지 생신이라서 그날 칼퇴근하려고 했단 말이죠. 미리 점심때 이야기도 해 두었고 그땐 어유 효녀네, 당연히 그래야지, 이렇게 맞장구란 맞장구는 다 쳐 놓고서는!”


감정이 받치는지 크게 소리를 높였던 이로미가 허공에 냅다 주먹질을 했다. 


“안 보내줬나 보네요?”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생신도 토요일이라면서 왜 금요일 오후부터 정신 사납게 세상 효도는 저 혼자 다 하는 것처럼 오두방정이냐고 타박을 하더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가족에 관한 일은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더니 난데없이 3/4분기 보고서 올릴 거를 당장 정리해 오라는 거예요. 자료도 다 오지도 않았는데. 그래서 못한다고 했죠.”

“정말요?”


김은지가 몹시 놀라워했다. 그녀로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탈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직속 상사가 시키는 일인데- 하는 것이 주어진 상황에 성실하게 적응하며 살아왔던 김은지의 사고방식이었으니까. 이로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심상하게 대답했다.


“그럼요. 말도 안 되는 걸 요구하는데 어떻게 해요. 저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억지를 부리잖아요. 영업팀 닦달해서 빨리 자료 내놓게 하라는데 그게 되냐구요. 승진이 코앞에 있는데 니가 제대로 받쳐줘야 되는 거 아니냐, 자기가 미리미리 챙겨가야 할 거 아니냐, 무기도 없이 전쟁을 하란 말이냐, 넌 왜 센스가 없냐 등등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더니만, 본인이 이사 되면 나도 좋은 일이라는 거예요. 그게 말이 돼요?”

“그렇죠, 말이 안 되죠. 그분만 좋은 일이지.”

“제 말이요!!”


이로미가 흙더미가 옛 상사 얼굴이라도 되는 듯 두드리며 분개했다. 앙증맞게 보이던 주먹이 내려 꽂힌 자리는 꽤 험하게 패여 버렸다.


“고생 많으셨겠어요...”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소리에 이로미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앞을 똑바로 쳐다봤다. 얼마나 용기를 끌어모아 입에 올린 말인지 귓불까지 발개진, 소년 티를 간신히 벗은 것 같은 이진우가 자발적으로 한 첫마디에 다들 입을 모아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요, 정말 힘들었겠다.”

“그래도 로미 씨는 씩씩해서 잘 버텼네요.”

“진짜 직장마다 그런 사람 꼭 있다니까.”


그저 짧디 짧은 한 마디씩이었는데도 이로미의 얼굴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일부러 인중을 쓱, 문질러 닦는 흉내를 낸 이로미가 푸스스 웃으며 결말을 들려주었다.


“그래서 그 담주 월요일에 출근하자마자 때려치웠어요! 부장님 하고는 도저히, 절대로! 같이 일 못 한다고, 그치만 부장님 말마따나 승진이 눈앞에서 당근처럼 달랑달랑하는데, 그거 아쉬워서 어떻게 부장님이 그만두시겠어요? 제가 그만둬야죠! 그러고, 회사 생활 끝. 땡, 쫑쫑쫑.”

“집에서 뭐라고 안 하셨어요?”


눈에 띄게 초조해진 목소리로 묻는 김은지에게 이로미는 다시 한번 연극적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한 소리 들었죠. 그래도 뭐 어떡해요. 도저히 안 되겠는걸. 그렇다고 부모님 면전에 대고 ‘아빠가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왜 호들갑이냐…’ 부장이 이랬다는 말을 할 수는 없잖아요. 근데 재밌는 게 뭔지 아세요? 집에 내려와서 이 동네에서 카페 취업했더니, 이젠 또 한동네에서 다시 같이 살아서 너무 좋다는 거예요. 진짜, 하나만 하시지 정신없게!”


아까보다는 조금 잔잔해진, 그러나 다정함으로 촘촘해진 웃음이 첫눈처럼 사람들 사이로 내려앉았다.


‘진짜 밝네. 저 사람 인생에 대해 누가 뭐라고 한들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을 것 같아.’


김은지가 혼잣속으로 중얼거리며 하고픈 이야기를 모두 쏟아낸 듯 이제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집중해서 흙으로 작은 구슬을 조르르 굴려 빚는 이로미를 부럽게 바라보았다. 많이 봐줘야 20대 후반쯤 됐을까 싶은, 구김살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그 젊은 얼굴이 눈부셔 보이는 만큼 김은지의 가슴 한구석은 쓰라렸다. 


좌절이나 자기혐오 따위에 자존감을 조금도 더럽혀 본 경험이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아가씨.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거, 그걸 뭐라고 하더라. 자기 이해력? 액션 영화의 히어로보다도 더 놀라운 능력이었다. 적어도 김은지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녀는 늘 생각했다. 내가, 조금만 더 나 자신을 잘 이해하고 있었더라면, 그러면 내 인생은 조금쯤 달라졌을까.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고 늘 그녀를 괴롭히는 자기 파괴적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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