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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May 10. 2024

어울리거나 어울리지 않거나

2.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5)

한 번 비뚜름히 흐르기 시작한 생각은 점점 기울어져 갔다. 자기혐오가 비늘처럼 도도독하니 돋아 올랐다.

거침없는 당당함. 김은지의 삶과 가장 거리가 먼 수식어였다. 아무리 시대의 훈(訓)이었다고는 해도, 김은지는 과도히 순했다. 인생 초반부가 부모의 뜻에 따라 흘렀다면 중반부터는 배우자의 의지에 따라왔다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모범적이었던 학창 시절, 한 치의 의심도 회의감도 없이 선택했던 직장과 결혼. 그리고 이어진 출산과 육아. 자신의 삶에 달라붙어 있는 꾸밈말들이, 김은지는 진저리 나게 싫었다. 한 번쯤은 그 길에서 탈선해도 괜찮지 않았을까, 생각해 봐도 이미 지나버린 시간들을 어떻게 할 도리는 없었다. 부질없는 생각에 얕은 한숨이 따라 나왔다.


“어떤가요? 너무 무른 것 같으세요?”

“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던 김은지가 흠칫 놀라 표정을 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들었다. 최현욱이 그녀가 푹푹 손가락으로 찌른 덩어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점도가 조금 불편하게 느껴지는 상태인 건가 싶어서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김은지가 빠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뭘 좀 생각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러셨구나. 괜찮아요. 저도 그러거든요. 뭔가 집중해서 생각해야 할 때 흙을 꼬집거나 꾹꾹 누르거나 그러다 보면 생각이 잘 풀리더라고요.”

“그렇군요...”


김은지가 성의 없이 맞장구를 치며 손가락으로 찔러댄 구멍을 가만히 눌러 막았다. 군데군데 푹푹 찔러놓은 그 자국들이, 자신의 마음에 난 구멍처럼 느껴져서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김은지의 행동을 못 본 척한 최현욱이 손뼉을 짝짝 치며 큼큼 목소리를 다듬듯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여러분, 하고 그들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이만하면 충분히 흙의 질감을 느껴보셨을 것 같고요. 이젠 여러분 앞에 있는 파일을 봐주세요. 두 분이 하나씩 나눠서 보시면 됩니다.”     


 최현욱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클리어 파일을 열어서 넘겨보던 수강생들의 입에서 한데 모은 것처럼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대여섯 종류의 동물 얼굴들이 그려진 도안을 구경하던 이들 중 누군가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여기 있는 도안을 옮겨 그리나요?”

“네, 혹시 따로 원하시는 형태가 있으면 직접 디자인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가능한 한 심플한 형태로 하는 게 좋죠. 예를 들면 구름 같은 거요. 오늘은 첫 시간이니만치 다루기 쉬운 형태를 해볼 겁니다. 납작한 접시라고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여기 샘플이 몇 개 있으니 한 번 보세요.”


최현욱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아직 목소리로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는 없어서 그 질문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앞으로의 수업 일정에서 내내 까다롭게 굴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염려와 달리 감탄사가 들려왔다.


“다 너무 예뻐서 뭘로 골라야 할지 전혀 모르겠어요...”


설렘이 묻은 망설이는 소리에, 긴장해서 뻣뻣해졌던 어깨가 절로 느슨해졌다.


“아, 교수님은 토끼로 하실래요? 그럼 저는 다른 거 해야겠어요.”


최현욱에게 익숙한 이로미의 목소리가 발랄하게 침묵을 깼다. 최현욱이 서둘러 끼어들었다.


“아니에요, 같은 도안으로 하셔도 괜찮아요. 똑같은 걸로 해도 빚고 색을 입혀서 구우면 확실히 달라요. 손을 타거든요.”

“그래도요. 김은지 선생님은 뭐 하실래요? 어, 얘는 여우다. 얘는... 너구리인가?”


최현욱이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 아직은 낯이 설 텐데도 붙임성 좋은 이로미가 재잘재잘 떠든 덕분에 하나둘씩 손을 뻗어 도안을 구경했다.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금세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인지 윤소은은 자연스럽게 끝이 뾰족한 도구를 들어 도안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요, 이거 도안 전부 선생님이 직접 그리셨나요?”


김은지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최현욱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도안과 최현욱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좀, 안 어울리죠?”


김은지의 얼굴이 가을볕의 대추처럼 확 익었다. 그녀가 황급히 사과의 말을 중얼거렸다.


“아뇨,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닌데...”


무슨 말을 덧붙여도 오해만 잔뜩 불거지리라 생각했는지 김은지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세상에 이렇게 흥미로운 일은 다시없을 것 같다는 듯이 입술을 꼭 말아 붙인 채 도안을 그리는 일에 집중했다. 어색한 몇 분이 지났을 때에야 김은지는 맞은편의 이진우를 보고 입을 동그랗게 벌리며 감탄했다. 놀란 것은 김은지뿐만이 아니었다.


“그림 실력이 보통이 아니네요?”


윤소은이 칭찬하자 이로미가 고개를 쓱 들이밀었다. 우와, 하는 감탄사가 터지자마자 이진우의 얼굴이 또 가을볕을 잔뜩 쬔 단풍처럼 발개지며 쓱쓱 잘만 움직이던 손이 삐거덕거리며 머뭇거렸다.


“어… 이런 거 좋아하거든요, 손으로 하는 거...”

“그냥 좋아하기만 한 게 아닌 것 같은데? 연습도 많이 했죠?”

“아, 그게.”


입을 다문 이진우가 살짝 입술을 물었다 놓더니, 나지막이 예에, 하고 답을 내놓고는 뭐가 그리도 낯부끄러운지 또 고개를 아래로 떨군 채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윤소은이 이상하다는 듯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렇다고 처음 본 사람에게 아까는 말 잘하는 것 같았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수줍음을 타냐고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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