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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May 14. 2024

작은 의미를 빚어가다 보면

2.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6)

“뭔가 만드는 게 좋았어요. 어릴 때부터요.”

“그렇구나. 좋겠다.”


심상하게 중얼거린 김은지의 말에 이진우가 깜짝 놀란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차, 싶어진 김은지가 서둘러 변명할 말을 찾았다.


“손재주 좋은 사람들이 부러웠거든요. 저는 그런 게 없어서. 그냥 시키는 공부밖에 할 줄 몰랐어요. 딱히 잘하는 것도 없고 좋아하는 것도 없고. 말하고 보니까 인생이 좀 허무한 사람이네요, 저.”

“어, 아니에요! 여기까지 오셨잖아요?”


이로미가 냉큼 그녀의 말을 부정하고 나섰다.


“진짜 매사가 권태로운 사람은요, 그런 생각도 안 해요. 그, 어... 김은지 선생님은! 여기까지 스스로 오셨잖아요. 그게 얼마나 대단한데요. 뭔가를 배워보겠다고 마음을 내는 건 진짜 대단한 거예요.”

“고마워요.”


그러나 이로미는 자신의 말이 제대로 위로가 되지 않았다고 확신한 것처럼 빠르게 덧붙였다.


“예전에 같이 일하던 분 중에 그런 사람이 있었거든요. 인생이 맨날 허무하대요. 그러면서 정말 아무것도 안 해요. 그렇게 허무하면 안 허무하려고 뭐든 해야 할 거 아니에요? 하다못해 매일 회화 패턴 하나씩 외우기라도 하든가. 근데 정말 아무것도 안 하면서, 그런 말만 거듭해서 옆에 있는 사람들 정신까지 너덜너덜하게 만드는데... 정말... 그거 진짜 몹쓸 병이야. 정신적 전염병이에요. 격리해야 된다고요. 아니, 이게 아니고, 그러니까.”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이로미의 모습은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자아내기 충분했으나 본인만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마침표를 찍듯 결연하게 선언했다.


“같은 말만 반복하면서 진짜 허무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소소한 귀여움을 빚겠다고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 대단해요! 진심!”     

"정말 맞는 말이죠. 여러분 모두 대단하신 분들이에요. 여기까지 용기 내어 와 주셔서 제가 더 용기를 얻었어요. 길지 않은 시간이어도 우리 나름의 의미를 만들어 보기로 하죠."

    

최현욱이 손뼉을 짝 치며 분위기를 바꾸었다. 

흙만 조몰락거리며 만질 때에는 딱히 집중할 만한 일이 아니어서인지 소소하게 주고받던 대화들도 도안을 옮겨 그리는 와중에 어느 사이엔가 뚝 끊겨서 공방 안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다들 열심인데 굳이 말을 걸어 집중을 깨는 것도 아니지 싶어 최현욱은 잠시 핸드폰을 켜서 플레이리스트를 눌렀다. 그에게는 몹시도 익숙한 선율이 흘러나왔다.


“어머, 너무 귀여워요. 이게 무슨 곡인가요?”


익숙지 않은 작업에 집중하느라 다들 목과 어깨까지 잔뜩 웅크리고 있기에 음악을 튼 것도 미치 눈치채지 못할 줄 알았는데도, 매끄러운 빙판 위를 순식간에 미끄러지는 듯한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선율에 반응한 사람이 있었다. 최현욱이 대답하려던 순간, 놀랍게도 수강생들 가운데에서 먼저 답이 나왔다.


“<춤추는 인형 The Dancing Doll>... 아닌가요? 콘 아모레 Con Amore.”


윤소은이 가볍게 답했다. 

질문했던 김은지는 그렇다 치고, 최현욱은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와우, 하고 감탄사를 흘리고 말았다.


“그걸 어떻게 아시죠? 인기가 많았던 음반이긴 한데, 요즘은 아주 매니아가 아니고서는 잘 모를 것 같은데...”

“저희 아버지가 고전음악을 아주 좋아하셨어요. 집안이 온통 음반 천지일 정도로. 덕분에 저도 아주 조금 들어서 아는 것뿐이에요.”

“듣자마자 연주를 알아차릴 정도면 아주 조금은 아니죠.”


윤소은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김은지가 어물거리며 끼어들었다.


“클래식이구나. 저는 클래식 별로 안 좋아해서 이렇게 귀여운 음악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어요.”

“그런 인식이 있죠. 하지만 소품들 중에도 대곡에 못잖게 빛나는 숨겨진 보석 같은 곡들이 있어요.”


아무래도 한때의 전공 분야가 화제에 오르자 최현욱의 목소리가 조금 열을 띠었다. 널리 알려진 큰 규모의 관현악곡처럼 찬란하지 않아도,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품은 음악은 대단한 작품성이나 존재감을 갖지 못한 그의 인형들처럼 어딘가 애잔하고 사랑스럽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너무 사적인 범주에 속해 있는 것 같아서, 섣부르게 입에 담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가 머뭇대는 사이 이진우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 


“저, 다 했는데요...”


그 모습이 사뭇 진지하기 짝이 없어서 최현욱은 덩달아 진중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섰다. 조금 소심한 성격일 것 같았는데, 뜻밖에 펜 나이프가 지나간 절단면은 거침없이 반듯했다. 그 자신이 그랬듯, 초보자라면 행여 망칠까 봐 힘이 들어가다 말다 해서 깔끔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나 이진우가 잘라낸 단면은 마치 숙련자가 해낸 것처럼 매끈했다.


“대단한데요. 초심자가 이 정도로 깨끗하게 작업하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인데, 아주 잘하셨어요. 손 감각이 굉장히 예민하신가 봐요.”


표정을 숨기려 애쓰는 듯했지만 이진우의 입가에 미처 다 감추지 못한 작은 뿌듯함이 대롱대롱 매달렸다. 그 작은 칭찬이 뭐라고, 이렇게 자랑스러울 일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으나 최현욱도 이진우도 그 기분을 한껏 즐겼다. 이진우를 필두로, 여기저기서 조그맣게 저도요, 저도 다 했어요- 하는 말들이 연이어 따라 나왔다. 갖가지 동물 얼굴들이 늘어선 테이블은 한껏 아기자기해졌다.


“우와, 이건 무슨 동물이에요? 진짜 귀엽다.”

“아, 알파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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