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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Apr 16. 2024

내가 만들고 싶은 시간

1.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다(10)

최현욱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스승의 공방은 늘 따스하고 풍부한 정감이 넘치는 곳이었다. 과연, 수강생들도 이 공방에서 그런 포근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전에 과연 수강생이 있을지부터가 의문이었다. 그러나 최현욱의 얼굴에 그런 불안이 떠오르자 이로미는 대번에 그의 염려를 한마디로 일축했다.


-선생님은 진짜 별 게(별 게 띄어쓰기) 다 걱정이시네요? 이미 제자 1호는 확보하셨으니까 염려 탁 놓으시라구요! 정 안되면 제가 유일무이한 제자가 되어드릴 테니까.

-너 언제는 바리스타 되겠다며? 


옆에서 진태하가 기막히다는 듯 끼어들자 이로미는 마지막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대체 요즘 세상에 누가 직업 하나만 갖고 산대요? 꼭 먹고사니즘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 두엇 정도는 있어야죠.


‘하긴, 그렇지.’ 이로미의 말을 상기한 최현욱은 가볍게 뭔가를 적어 내려갔다.

목적지를 반드시 정해야 할 필요는 없다. 인생이란 긴 여정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 나가는 도구로서, 혹은 조력자로서 이 수업이 도움이 되기를. 그것이 이 클래스의 지향점이 되면 좋겠다고, 최현욱은 생각했다.

그는 고심 끝에 8주짜리의 수업 커리큘럼을 간신히 완성했다. 일단 첫 주 차 수업이라면 고민할 것도 없었다. 그가 처음으로 만들었던 납작한 접시를 떠올리던 최현욱은 금세 몇 가지의 샘플 도안을 그렸다. 토끼, 다람쥐, 여우, 너구리. 각자 특색이 있는 동물들의 얼굴을 스케치하던 그의 얼굴은 금세 자신이 그리던 동물들의 표정들처럼 시시각각으로 바뀌었다.


시작은 맹랑한 이웃 카페 직원의 추진력 덕분이었을지 모르나, 애초에 정 싫었으면 딱 잘라 거절할 수도 있지 않았던가. 어쩌면 이 수업은 그의 예상을 깨고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었고, 예상한 만큼의 결과를 내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해보지도 않고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최현욱은 모처럼 공방을 제대로 둘러보며 조금씩 의욕을 내기 시작했다.


디리딩.

원래 현욱은 메시지를 바로바로 확인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지금은 클래스 공지가 나간 상황이다. 혹시라도 수업 문의일까 싶어 최현욱은 급하게 엎어놓은 스마트폰을 바로 세웠다.


「안녕하세요, 카페에서 수업 안내문을 보고 여쭤봅니다. 수강 기간과 수업료를 여쭤봐도 될까요?」


최현욱은 대뜸 수업료를 묻는 문자를 보고 잠시 멍하게 있었다. 무엇을 가르칠지만 며칠간 내내 열심히 고민했지, 현실적인 문제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선반에 자리한 동물 인형들의 또롱한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금 고민에 빠져들었다.


‘쉬어가는 곳이면 좋을 텐데.’


직전까지 고민한 바와 같이, 그는 자신이 마련하려는 수업이 누군가의 삶에서 쉼표가 되기를 바랐다. 그다음으로 가기 위한 동력을 얻어갈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니만큼 돈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됐다. 감사하게도 그에게는 적어도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자산은 있었다. 그러니 시간을 내어 오는 수강생들이 최소한의 부담으로 재충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쯤, 못할 것도 없었다.

가장 결정하기 어려웠던 세부적인 항목들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나자 최현욱의 손이 거침없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머릿속이 분주해지면서 뭔가 잔뜩 그려진 종이 뭉치들이 책상 위에 수북이 쌓여갔다.


***


고단하기 짝이 없는 하루 일과를 가까스로 마친 뒤 방으로 돌아온 이진우는 이부자리를 깔 힘도 없어 베개만 끌어내 방바닥에 던져두고 몸을 뉘었다.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다 말고 그제야 뭔가 생각난 듯 웃옷 주머니를 뒤져 꼼꼼하게 접어 넣어두었던 광고지를 펼쳐 읽어나갔다. 이번에 다시 가면 사진이라도 찍어와야겠다, 생각했는데 그새 수업 홍보물이 벽면의 우편함 같은 곳에 담겨 있었다. 관심 있는 분은 누구든 가져가시라는 다정한 말풍선 모양의 멘트와 함께. 아마 이것도 그 직원분이 쓴 거겠지, 하고 혼잣말을 한 이진우가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누가 자신을 빤히 보기라도 한 듯 머쓱하게 코끝을 매만졌다. 


예쁜 사람이었다. 아니, 그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자로 대고 자른 것처럼 조금의 비뚤어짐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가지런한 단발머리 사이로 보였던 얼굴은 누구도 섣부른 허튼소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고 야무졌으나, 누군가를 응대할 때는 거짓말처럼 사르르 풀어져 환하게 빛났다. 


공간을 밝히는 사람그런 표현을 어디서 본 기억이 나는데, 설마 따분한 문장이 자신의 현실로 걸어 들어오는 일이 있을 줄이야. 그건 뭐라 설명할 수가 없는 느낌이었다. 그 미소에 홀려서 그녀가 붙이고 있던 홍보물에 관심을 주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었지만, 막상 그 내용을 제대로 읽어본 순간 이진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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