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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Apr 12. 2024

마음을 위한 갭이어gap year

1.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다(9)

“가만있자... 이 애가, 종이...”

“스코티쉬 폴드 아니에요?”


강경희가 이번만큼은 노련한 표정을 놓치고 진심으로 놀란 얼굴을 했다. 자신이 전문가의 진심 어린 감탄을 끌어냈다는 자부심에 나예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잘 아는구나. 대단한데?”

“저 고양이 좋아하거든요!”

“정말 그런 것 같네.”


나예는 이 고양이를 사랑스러워하는 마음뿐 아니라 집에서 키웠으면 좋겠다는 뜻을 온몸으로 발산하는 중이었다. 자신조차 추스르기도 힘든 우울증으로 휴직계를 내고 나온 마당에 얼떨결에 고양이를 구조한 것도 모자라 그 생명을 돌보아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두꺼운 솜이불처럼 무겁게 김은지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눈앞이 하얗게 바래지는 기분으로 가만히 서 있던 그녀를 알아챈 듯, 강경희가 다정히 말했다. 


“괜찮으시겠어요?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아, 네, 괜찮아요.”

“엄마, 내가 집중해서 들을게! 걱정 마.”


소리 내어 대답할 기운도 없던 김은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료실에서 만난 수의사는 차분하고 조용한 말투로 이런저런 것을 물었고, 이미 엄마에게 어제 구조 당시의 전반적인 상황을 들어 알고 있던 나예가 야무지게 답했다. 분명히 뭔가 많은 이야기가 오가는 것을 들었는데, 그 어떤 이야기도 그녀의 머릿속에 제대로 입력되는 것이 없었다.


“어머님?”

“아, 네!”

“아이가 생각보다 건강하네요. 지금 좀 배도 고플 것이고 버려진 기억 때문에 위축되어 있을 거예요. 집에 가셔서 천천히 따뜻한 물수건으로 먼저 닦아 주시고, 밥은... 지금 한 8개월 정도 된 것 같아서 키튼 사료 먹이면 됩니다.”

“네네!”


김은지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나예가 신이 나서 대답했다. 김은지는 여러모로 멍한 기분이었다. 김은지가 휴직계를 낸 이유는 소진될 대로 소진된 자신을 어떻게든 되살리고 싶은 생존본능 때문이었다. 자기 자신을 되살리기에도 벅찬 이 시기에, 고양이라니, 고양이라니! 김은지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사료는 나가서 우리 강 선생님께 물어보시면 자세히 알려 주실 거예요. 건강은 큰 문제없으니까 걱정 마시고. 아직 날이 추우니까 따뜻하게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아이가 좀 적응되면 천천히 나와서 돌아다닐 텐데 너무 의식하지 마시고 편하게 대해주세요.”


후로 김은지는 뭐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게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고, 카드를 내밀고, 연신 들떠있는 나예를 흘깃흘깃 보다가 어느 사이엔가 다시 차로 돌아와 앉아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내내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나예가 흘끔 그녀를 살피며 인심 쓰듯 말했다.


“엄마, 아직까지 멍해 보여. 커피라도 한 잔 사 오든가. 난 여기서 호야랑 기다릴게.”

“호야?”


그 말에 김은지가 정신이 든 것처럼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나예가 말갛게 웃었다.


“응. 임보라도 부를 이름은 있어야잖아. 뭐... 우리가 계속 키우면 더 좋지만.”

“그런가...”


어제부터 계속 허깨비에 홀린 것만 같았다. 갑자기 엉뚱한 이야기 속으로 던져진 조연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나예의 배려인지 재촉인지 모를 등쌀에 카페 방향으로 터덜터덜 걷던 김은지는 문득 카페 창에 붙은 홍보물을 발견했다. 커다란 타이포그래피에 쓰인 문구가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공방, 숨]클래스 오픈! 수강생 상시 모집. 문의는 아래 번호로 부탁드려요.>


김은지는 가만히 폰을 들어 우선 전단지를 찍어두었다.      


***


이로미가 홍보지를 붙인 날로부터 며칠간, 최현욱은 몇 시간씩 공방에서 제일 넓은 테이블에 노트를 펼쳐두고 앉아 고군분투했다. 그냥 자신이 만들고 싶은 걸 만들고, 주인을 찾아주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느끼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자의건 타의건, 이제 학생을 가르치는 입장이 될 수밖에 없는 그는 오래전 자신이 처음 뉴욕에서 스승의 공방에 발을 들였던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만 해도 풋풋한 음대생이었던 그때를.


겉보기엔 그냥 평범한 가게였다. 아니, 조금은 특이했으려나. 이오니아 풍의 기둥이 양쪽에서 떠받치고 있는 유리창에 눈길을 준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뭐가 좀 다른데, 뭐지― 하고 잠시간 그곳을 관찰한 최현욱은 곧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시선을 당긴 그것을 뚫어지게 관찰했다. 쭉 뻗은 대리석 기둥 사이에 자리한 디스플레이 공간에 있는 것은 작은 생태계였다. 굳이 표현하자면, 사랑스럽고 작은 이야기의 생태계라고 해야 할까.

최현욱은 작은 도자기 인형 하나하나의 표정과, 몸에 그려진 무늬와 색을 유심히 살펴보다 홀린 듯이 기둥 옆에 한걸음 물러서서 기다리고 있던 출입문을 밀었다.


 -구경하러 오셨나요?


넋을 놓고 공방 안 곳곳을 둘러보는데 등 뒤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화들짝 놀란 최현욱을 향해 풍채가 좋은 초로의 남자가 빙긋이 웃어 보였다. 최현욱이 네, 하고 머뭇거리며 대답하자 그가 한결 느긋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천천히 봐도 됩니다. 마음에 들어요?

-굉장히... 예쁘네요. 귀엽고 예쁘기만 한 게 아니고... 꼭 말을 거는 것 같아요.


최현욱의 대답이 어떤 점에서 그를 기쁘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공방 주인은 몹시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 내가 이곳의 주인인 아이작 프랭클입니다. 다 내 손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지요.


찾아갈 때마다 기분이 좋았던 단골 가게는 잠깐씩 짬을 내어 일하는 곳이 되었다. 그러다 어느새 최현욱은 아이작 노인의 하나밖에 없는 애제자가 되었다. 부모님이 그를 이역만리 미국에까지 보냈던 건, 아들이 원했던  바이올린 공부를 뒷바라지하기 위해서였지, 도자기 인형에 빠져들라고는 아니었을 것이다. 죄책감과 아늑한 만족감 사이를 왕복하며 흙을 만지던 그 세월이 어쩌면 최현욱의 인생에서 가장 안온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성인으로서 1인분의 삶을 오롯이 감당해야 할 사회적 책임도 조금은 덜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원 없이 배우며 간혹 생기는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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