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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Apr 29. 2024

마음에 거스러미가 일어나면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곧 펄롱은 정신을 다잡고는 한번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을 정리했다. 각자에게 나날과 기회가 주어지고 지나가면 돌이킬 수가 없는 거라고. 게다가 여기에서 이렇게 지나간 날들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게, 비록 기분이 심란해지기는 해도 다행이 아닌가 싶었다. 날마다 되풀이되는 일과를 머릿속으로 돌려보고 실제로 닥칠지 아닐지 모르는 문제를 고민하느니보다는. -36쪽



이처럼 사소한 것들 | 저자 클레어 키건 | 출판 다산책방 | 발매 2023.11.27. 


작법서를 보면 흔히 나오는 조언 중에 반복적으로 보이는 말이 있다.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는 것은 딱히 그런 책을 보지 않는 사람조차도 들어본 말일 터다. 또 어떤 책에서는 이렇게도 말한다(아마도 스콧 벨이었던 듯). 템포를 조절하라고. 화자에게 크게 심적인 동요를 일으키는 부분에서는 슬로우 모션으로 마치 소묘를 하듯 문장을 쓰고, 시간을 빨리 넘겨야 할 때는 빠르게 설명으로 치고 넘어가라고. 클레어 키건의 문장을 읽다 보면 바로 그렇게 쓰인 소설이 아닌가 싶다. 


눈이 나리듯 소록소록 쌓이는 문장들이 어느 순간 눈사태처럼 밀치고 들어오는 찰나가 있다. 빌 펄롱의 매일매일의 일상이, 


늘 이렇지, 펄롱은 생각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 -29쪽


그에게는 당연하고도 지루할 정도로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었어도, 그 가운데에서 그를 무엇인가가 불편하게 할 때, 펄롱은 곱씹어보는 쪽을 선택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저 마음에 걸린다는 이유로. 그가 자신의 마음을 언짢게 하는 것을 쉽게 찾아낼 수 없어 아내에게 말을 꺼내어보지만, 펄롱의 아내는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야 하는 일에 무엇하러 신경을 쓰느냐는 말로 그를 타박한다. 그 말은 펄롱을 몹시 아프게 찌른다.


“그게, 세상에는 사고를 치는 여자들이 있어. 당신도 그건 잘 알겠지.”
강한 타격은 아니었으나, 그때까지 아일린과 같이 살면서 그런 말을 들어보기는 처음이었다. 뭔가 작지만 단단한 것이 목구멍에 맺혔고 애를 써보았지만 그걸 말로 꺼낼 수도 삼킬 수도 없었다. 끝내 펄롱은 두 사람 사이에 생긴 것을 그냥 넘기지도 말로 풀어내지도 못했다. -56쪽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아내가 비난조로 말하는 사고를 치는 여자와 그는 결코 먼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 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 -56쪽 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그녀의 말대로라면 편협하기 짝이 없는 그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구르고 있었을 존재가 바로 그 자신이었기에 펄롱은 결코 자신이 봐버린 것에 무감할 수 없다. 지금 그가 누리고 있는 안온한 삶의 그의 몫이 될 수 없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그의 현재는, 결코 누군가의 곤란한 사정을 모른 척하지 않고 거두었던 어떤 노부인의 다정과 친절이 아니었으면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펄롱은 자신의 삶이 가장 크게 빚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그도 분명코 처했을 수 있었던 밑바닥 삶의 위기에 놓인 이들을 백안시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가 마을을 오가며 목도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껄끄러움들은 끝끝내 펄롱을 어떤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순간으로 떠민다. 어쩌면 그의 인생을 평탄한 길로부터 진창으로 떠다밀 수밖에 없는 결단의 순간 앞에서 우리는 모두 숨을 삼킬 수밖에. 우리는 그가 좋은 사람임을 알고 있기에 그가 어떤 결정을 내려주기를 바라지만, 또한 그 결단으로 인해 그가 가시밭길을 가게 될 것임이 명백하게 보여 한편으로 안타까운 한숨을 뱉는다.


펄롱의 자신의 어떤 부분이, 그걸 뭐라고 부르든― 거기 무슨 이름이 있나? ―밖으로 마구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대가를 치르게 될 테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갓난 딸들을 처음 품에 안고 우렁차고 고집스러운 울음을 들었을 때조차도. -120쪽 


어딘가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기까지 한 이 뿌듯함을 가슴에 안고 있는 그를 보노라면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121쪽 


뭐가 어찌 되었든 펄롱을 응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찬란하게 다정한 마음들을 이토록 선명하게 잡아 그릴 수 있는 키건의 문장들을 보노라면 절로 인상주의 예술가들을 떠올리게 된다. 찰나에 지나가버렸으나 마음을 깊게 건드린 그 순간들을 어떻게든 붙잡아두고 싶어서, 그것을 전하고 싶었을 그 마음들을. 그 위에 옅게 한 겹 드리운 애잔함의 잔영을 갈무리하는 것은 읽은 이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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