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화 May 08. 2024

너는 세상 누구보다 좋은 사람

나쓰메 소세키, 도련님

나쓰메 소세키. 


언제부터 이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 어쩌면 굉장히 오-래 전에 나왔던, 문학사상사의 어마어마하게 인상적인 (입체파도 아니고, 도대체 이거 무슨 사조 느낌인지를 모르겠…) 고양이 그림을 발견한 뒤부터였을지도. 당장 나를 데리고 가거라, 같은 이 느낌. 참고로 강남역 동화서적이었다. 그런 서점이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아무튼 그리하여 카리스마 짱짱인 고양님을 거역할 힘이 없어서 고이 모시고 왔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작가가 궁금했다. 도대체 뭐 하는 분인 거야, 이 양반. 그래서 당시로서는 그리 널리 쓰이지 않았던 인터넷(그런 시절이 있긴 있었다고 합니다)을 뒤져서 얻어낸 결과를 보고 한참 멍 때리기를 시전 했더랬다. ‘고아하다’라는 말을, 이렇게 온몸으로 뜻풀이를 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긴 있었구나. 게다가 도대체 어디서 봤는지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지만 필체 또한 어찌나 우아한지. 이것이야말로 귀족적인 것이로구나. 스물 조금 넘었던 나는 그렇게 감탄했다. 그분의 생애 전반부가 어떠했는지에는 관심도 없었고 배경지식 같은 건 손톱 반달만큼도 없었으니까. 


한가해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을 두드려 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 -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507쪽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가져온 한 문장인데, 나쓰메 소세키의 생에 대해 몰랐을 때에는 그저 그렇구나 하며 넘어갔던 것이 이제는 눈 끝에서도 탁 걸려버린다. 담담한 저 문장이 한 줄로 정리되기까지 마음이 많이 깎여 나갔겠구나, 수없이 여러 번 파도가 쳤겠구나, 그런 끄덕임과 함께 내 마음도 수런수런 하다. 


도련님 | 저자 나쓰메 소세키 | 출판 휴머니스트 | 발매 2023.07.17.


요즘 너무나 좋아하는 모 출판사의 전집을 하나씩 독파하고 있는데(어느 정도로 좋아하는가 하면, 일을 사서 하는 나조차도 거부하는 서평단에 자청해서 참여신청을 하려고 했을 정도로 좋아한다… 하지만 결국 신청서 내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어처구니없는 후문), 얇기도 하겠다 금세 읽겠네 하며 주워 든 것이 바로 「도련님」. 그러나 나는 매번 하는 실수를 또 해버렸으니, 대체로 고전이라 하는 것은 두께가 얇을수록 페이지 한 장 넘기는 속도가 외려 500-600페이지에 육박하는 장르소설의 세 배쯤 오래 걸린다는 사실을 망각하였다… 모지리 같으니.


아버지는 나를 요만큼도 예뻐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형만 편애했다. 형은 유독 얼굴이 하얘서 여장한 가부키 배우 흉내를 잘 냈다. 아버지는 나만 보면 어차피 글러먹은 놈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내가 하도 우악스러워서 앞날이 걱정이라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보시다시피 이 꼴이다. -10쪽 


책을 펼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런 폭력적인 문단을 만나면 가슴이 콱 막히는 것은 아마 나이 탓이겠지. 


한데 나는 어차피 남의 호감을 살 만한 성격이 아니라고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한테서 하찮은 나무 쪼가리 취급을 받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기요 할멈처럼 나를 애지중지하는 게 수상할 지경이었다. 기요 할멈은 부엌에 아무도 없을 때, “도련님은 성품이 바르고 참 착합니다”하고 칭찬해주는 일이 더러 있었다. -12쪽


하고, 금세 화자를 애지중지하는 어른이 나와서 눈앞이 조금 또랑해지고 읽을 만해진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할머니를 만나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인물이 되고, 싫어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망한다고 믿는다. 나는 그때 딱히 뭐가 되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래도 기요 할멈이 된다, 된다 하니까 뭐가 되긴 되겠구나 싶었다. -14쪽 


이런 대목에 이르면 꼿꼿이 세우고 있던 허리도 느슨해지고 입가도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 부모인 것이 제일 좋겠지만, 부모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단 한 사람이 아이의 삶을 단단한 믿음으로 지탱해 준다면 아이는 어긋나지 않는다는 단순하고 굳건한 진리는 널리 알려질수록 좋은 거니까. 그건 그렇고 이 화자는 참으로 호탕하고 귀여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다. 단순하고 정의롭고, 음습한 비밀을 감추고 있는 사람을 싫어한다. 


나도 중학생 때는 장난질을 약간 했다. 하지만 누구짓이냐고 물었을 때 꽁무니를 빼는 비겁한 행동은 한 번도 안 했다. (...) 장난과 벌은 쌍으로 따라온다. 벌이 있으니 장난도 마음 편히 칠 수 있다. 장난만 치고 벌은 피하려는 비열한 근성은 어느 동네 유행이냐. 돈을 빌려놓고 안 갚는 것도 분명 이런 녀석들이 졸업해서 하는 짓이다. -52쪽


이러한 사람이니 기요 할멈은 도련님은 성품이 바른 이라고 칭찬을 거듭했겠지. 아이 본인은 몰라도 어른의 눈에는 그런 게 잘 보이니까. 그런데 왜 부모는 이런 아이를 그토록 미워했을까. 아마도 특별한 이유가 없을 것이다. 작중의 부모는 나쓰메 소세키 본인의 친부모를 그대로 그려 낸 듯한 인물들이니까. 


잘은 몰라도 좋은 사람은 아니다. 겉과 속이 다르다. 인간이란 모름지기 대나무처럼 올곧지 않으면 믿음직스럽지 않다. 올곧은 사람하고는 싸워도 기분이 좋다. -112쪽


겉으로 보기에 붉은 셔츠가 아무리 위엄 있고 잘나 보여도 사람을 속마음까지 끌리게 할 수는 없다. 돈이나 위력이나 논리로 인간의 마음을 살 수 있다면, 고리대금업자나 경찰이나 대학교수가 가장 큰 호감을 사야 한다. 중학교 교감 정도의 논법으로 어찌 나의 마음을 움직인단  말인가. 인간은 좋고 싫은 감정으로 움직이는 법이다. 논리로 움직이는 게 아니다. -125쪽


극히 동감하는 바이다. 인간이 논리로 움직였으면 세상이 지금 이렇지는 않겠지…

그건 그거고.


우리의 마음속에 남들에게 차마 들려줄 수 없는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나는’ 빈 공간만이 있는 게 아니라,  각자의 기요 할멈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무슨 실없는 짓을 해도, 내가 나를 가장 불신하고 미워할 때에조차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다. 너는 뭐든 잘할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로 말해주는 기요 할멈이. 아마도 그건 우리가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자 떠날 때 안고 갈 수 있는 가장 따스한 추억이 될 거다.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은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