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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May 24. 2024

잘 노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2.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9)

윤소은은 조심스럽게 들고 왔던 웰시 코기를 부엌 테이블에 우선 내려놓은 뒤 집안을 신중하게 둘러보았다. 구석구석 모르는 데가 없다고 생각할 만큼 눈에 익혀둔 공간이라 생각했음에도 목적을 갖고 둘러보는 집안은 일상적으로 둘러볼 때와는 또 달랐다. 인형이 돌아다닐 리도 없고 불편하다고 하소연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윤소은은 저절로 어디에 두어야 강아지 인형이 가장 편하게 느낄까를 고민하는 자신에게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름부터 지어줘야겠네. 가만있자, 뭐라 부를까.”


테이블 위에 놓아둔 코기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윤소은이 혼잣말을 했다. 부드럽게 입에 감기는 이름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낯부끄러운 이름이어도, 남들 앞에서 부를 일은 없을 테니까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 라미.”


감긴다, 라는 단어를 연상하자마자 함께 떠오른 이름이었다. 동그라미, 에서 딴 라미. 상냥한 울림도, 쉬운 발음도 마음에 들었다. 다만 카페 직원이자 같은 수강생 입장인 로미와 형제처럼 돌림으로 지은 것처럼 들리는 것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밖에서 이름을 말하는 실수만 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면 될 것 같았다.


“안녕, 라미야. 우리 집에 잘 왔어. 나랑 잘 지내보자.”


아침에 바빠서 미처 치우지 못했던 약봉투를 치우다 밑에 깔려 있던 레이스 도일리를 발견한 윤소은이 그것을 빤히 보았다. 서울에서 조그만 꽃집을 운영하는 친구가 틈날 때마다 화분 물받침 밑에 깔 용도로 만드는 것이라며 그녀에게 완치 판정을 축하하는 화분과 함께 선물했던 것이었다. 친구는 물받침 밑에 깔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흙이 배인 물이 흘러넘칠 수도 있는데 새하얗고 예쁜 것을 그 밑에 밀어 넣기는 어쩐지 마음이 불편하던 참이었다.


“잘 어울리려나.”


윤소은이 코기를 레이스 도일리 위에 앉혀보았다. 원래부터 그럴 용도로 만든 것처럼, 놀라울 정도로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왠지 흐뭇한 기분에 사진이라도 찍어볼까 하며 핸드폰을 들어 올려 초점을 맞추다 보니 호르몬제를 넣어둔 봉투가 눈에 거슬렸다.

옆에 치워버릴 심산으로 주워 들었다가, 마음이 바뀌어 윤소은은 약봉투를 조심스레 코기, 아니 라미의 등 위에 올려놓아 보았다. 마치 배달이라도 온 것 같은 모양새다. 하루치 약을 이렇게 배달받아 볼까.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에게. 오늘의 라미가, 내일의 나에게. 윤소은은 홀로 흐뭇하게 웃었다.


“널 데려오길 진짜 잘한 것 같아.”


***


김은지는 소파에서 가로누워 방만하다의 뜻풀이를 온몸으로 해설하며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하느라 여념이 없는 나예를 흘깃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공부할 마음이 없는 아이에게 공부하라는 재촉만큼 무용한 말도 없건만,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걸 지상 과제처럼 여기며 살아온 김은지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의 모범이라 할 만한 딸을 볼 때마다 마음에 질척하게 녹은 엿가락이 들러붙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게다가 그 여유만만 방만한 라이프에는 얼마 전 구해 온 고양이까지 가세해 있었다. 뭐라고 이름을 붙였더라. 맞다, 호야라고 했었다. 작은 상자 안에 갇혀 생사를 오갔던 녀석이 맞나 싶을 정도로 명랑한 이 녀석은 나예를 몹시 좋아해서, 나예가 집에 있을 때면 늘상 그 옆에서 맴돌았다. 마치 인공위성처럼. 녀석은 이 집에서 자신이 영원히 행복하게 살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모양이었다. 

김은지는 늘 그렇듯, 누군가가 자신에게 기대를 내비칠 때 그것을 거절하지 못했다.


“어, 엄마 왜? 엄마 드라마 볼 시간 아직 아니잖아?”


자신들을 멀뚱히 보고 있던 김은지의 시선을 그제야 의식한 듯 소파에서 부스스 일어나며 나예가 물었다. 김은지가 딸 옆으로 가서 소파에 풀썩 주저앉으며 퉁명스레 말했다.


“니네 팔자가 하도 부러워서 그런다, 왜.”

“엄마, 나도 엄마 부럽거든. 사람은 원래 다 자기가 못 가진 걸 부러워하는 거래.”

“쥐방울만 한 게 말은...”

“아, 왜. 쥐방울도 하고 싶은 말은 많을 수 있지. 엄마도 나만할 때 공부하는 틈틈이 나름 인생을 즐기고 농땡이도 치면서 살았을 거 아냐. ”

“... 엄마는 항상 성실하게 살았거든.”

“와, 왜 그랬어. 야자도 한 번씩 제껴 주고 급식 대신 떡볶이도 먹으러 가고, 티켓팅도 하러... 아니다.” 


조잘조잘 말을 늘어놓던 나예가 김은지의 눈치를 보면서 말을 줄였다. 이미 제가 저질렀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무용담처럼 늘어놓은 뒤에 그러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랴만. 김은지가 피식 웃으며 나예의 머리를 헤집었다.


“그래, 잘했어. 엄마가 살아보니까 좀 그렇게 규율을 깰 줄도 알고 그래야겠더라. 엄만 그걸 못해본 게 너무 아쉬워. 사람이 너무 시키는 것만 잘하면서 살다 보니까 이렇게 시시한 인간이 되더라. 자기 뜻대로 해보는 경험, 그게 그렇게 중요한지 엄마가 알았겠니. 그땐 엄마처럼 하지 않으면 선생님들 눈밖에 나서 굉장히 힘들기도 했고.”

“엄마, 괜찮아? 어디 아픈 거 아니지?”


평소와는 사뭇 다른 태도에 오히려 잔뜩 걱정 어린 얼굴이 된 나예가 몇 번이고 캐물었다. 김은지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조심스레 손을 뻗어 호야의 등줄기를 쓰다듬었다.


“아니야. 그냥 생각이 좀 많아져서 그래. 이렇게 심심한 엄마한테서 너처럼 주도적인 애가 어떻게 나왔는지 좀 신기하기도 하고.”

“그치. 내가 한 자기 주도하지.”

“그래. 노는 쪽에서.”

“노는 거 중요해, 엄마.”

“엄마도 그렇게 생각해.” 


김은지가 수긍하며 웃었다. 나예가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눈코입을 힘주어 오므린 채 김은지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나예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엄마, 인제 재밌게 살아. 알았지? 나랑 약속해.”


나예의 사뭇 비장한 말에 깜짝 놀란 김은지가 되물었다.


“갑자기?”

“빨리 약속해. 엄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재밌게 살 거라고.”


김은지는 지금 코 앞에서 손가락을 내밀며 마구 독촉하는 딸 나예가 고양이를 데리고 동물병원에 다녀온 날, 은지의 가방에서 삐져나온 복약 지도문을 읽었다는 사실을 김은지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피로가 누적되어서 휴직했다는 거짓말도, 우울증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도 모두 순식간에 눈치챌 정도로 딸이 자랐다는 사실을 그녀는 여전히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은지가 나예의 앞이마를 검지로 쭈욱 밀어내면서 투덜거렸다.


“엄마 요즘 재밌어. 도자기 배우러 다니잖아.”


나예의 얼굴이 환해졌다. 호야를 꽉 끌어안은 나예가 사뭇 명랑해져서 연달아 질문을 던졌다.


“그 병원 옆에 있는 공방? 뭐 배워? 벌써 뭐 만든 거야? 나 볼래!”

“옆은 아니고 건너편... 이제 겨우 한 번 갔어. 지금 접시 만드는데, 다음번에 가면 아마 첫 작품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근데 너 왜 이렇게 신났어?”

“궁금하니까 그렇지!” 


나예의 품에 꽉 가둬진 호야가 몸부림을 쳤다. 그제야 고양이를 놓아준 나예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엉킨 머리를 다시 모아 묶다가 입에 머리끈을 문 채로 덧붙였다.


“어하, 으허 마드허오어 아호 혹 호어혀!(엄마 뭐 만들어오면 나도 꼭 보여줘!)”


김은지가 마침내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도대체 뭐라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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