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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Jun 25. 2024

일단 해보세요!

4. 결핍은 채워 가면 되죠(2)

역시나 이로미가 별 고민도 없이 과감하게 작업대에 손을 올리고 앞뒤로 부드럽게 밀었다. 이미 만들고 싶은 것이 머릿속에 확실하게 떠오른 자신감 있는 태도였다.


“로미 씨는 벌써 디자인 정했어요?”

“아뇨?”


기대도 못한 당혹스럽게 밝은 대답에 잠깐 혼란해진 최현욱이 입만 뻐끔거렸다. 이로미가 혀를 쏙 내밀었다.


“아니, 아예 안 정한 건 아니고, 한 20센티 정도 되는… 오목한 접시? 그런 거 만들어보고 싶어서요. 왜, 저 베이킹도 배우잖아요, 선생님.”

“아, 맞다. 들었어요. 샘플로 제공도 한다면서요.”


이로미가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윤소은이 미소로 끼어들었다.


“저 서비스로 대접받아봤어요. 정말 맛있던데요. 로미 씨는 못하는 게 없나 봐요.”

“아니에요! 못하는 거 엄청 많아요. 근데 시도해 보는 게 재밌어요. 이것저것 시도해 보다 보면 나랑 맞는 게 있고 안 맞는 게 있고, 그렇더라고요.”

“오, 그럼 안 맞는 건 거기서 그만두고, 맞으면 계속하고?”


그런가? 하고 잠시 스스로에게 묻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던 이로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게 맞는 것 같아요. 일단 시도해 보지 않으면 모르잖아요, 제가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할 수 있는지.”

“그건 그렇지.”

“그게 중요한 거 같아요. 나 자신을 알기 위해서 뭐라도 해보는 거. 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잖아요.”


어느새 흙을 굴리는 것도 잊고 이로미의 달변에 홀린 것처럼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김은지가 새삼 감탄한 듯 말했다.


“로미 씨 부모님이 정말 궁금해지네요.”

“네? 왜요?”

“아이를 어떻게 키우면 그렇게 명랑하고 긍정적으로 클 수 있는지 너무 궁금해서요.”

“아, 그거요. 근데 그게 저한테만 해당사항 있는 건지 애들한테는 다 공통적으로 통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한테는 확실히 효과 있었는데.”

“그래도 말해주면 안 돼요? 너무 궁금하다.”

“그게…어. 그냥 하고 싶어 하는 거 하게 놔뒀어요, 저희 엄마는.”

“하고 싶어 하는 거요?”


그 안에 뭔가 자신이 모르는 심오한 양육의 방침 같은 게 있을 거라고 속단한 김은지가 사뭇 진지하게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얼마나 힘주어 굴리고 있었던지 흙가래는 이미 가느다란 국숫발 같은 모양새였다.


“네. 제가 공부 안 하고 놀아도 냅뒀어요. 근데 은지 선생님, 그거 너무 가늘어진 것 같아요.”


이로미가 헤헤 웃으며 김은지의 손등을 가리켰다. “어머나.” 당황한 김은지가 흙을 다시 뭉쳐 조심스럽게 굴렸다. 망신스럽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떨군 얼굴이 붉었다.


“어머니가 대범하시다.”


윤소은이 빈정거림 없이 순수하게 감탄한 어조로 말했다. 이로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보탰다.


“네엡. 근데 딱 하나는 엄격하게 지켜야 됐어요, 제가.”

“뭐를?”

“하루 종일 피시방 가서 게임을 해도 됐고, 대여점 가서 만화 보고 소설 보고 와도 뭐라고 안 했는데, 반드시 그걸 보고 뭘 깨달았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세 줄을 써내야 했어요. 그것만 하면 야단을 안 맞았죠.”


어느새 수강생들은 다들 입을 벌린 채 기계적으로 가늘어진 흙가래를 밀면서 이로미의 말을 경청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심지어 그걸 지적해야 했던 최현욱조차 이야기에 빠진 것 같았다.


“그래서요?”

“전과목 9등급의 신화를 쓸 뻔했죠, 근데 그 짓을 4년, 5년 넘게 하다 보니 다른 건 다 몰라도 자기 객관화 하나는 확실하게 잘 됐어요. 나중에 면접관이었던 임원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이 얘기가 엄청 인상적이었다고.”

“정말 그러네요.“


윤소은이 빙긋이 웃으며 동조했다. 이로미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자랑스러운 얼굴을 했다.


“내가 나에 대해서 대체로 잘 파악하고 있는 거, 그거 진짜 희소한 능력이라는 걸 학교 졸업할 때쯤 알게 됐어요. 어딜 가도 그걸 굉장히 높게 쳐주더라고요.”


최현욱은 다른 의미로 그녀에게 감탄하는 중이었다. 처음 배울 때 그도 그랬지만, 보통은 손놀림에 집중하느라 옆에서 건네는 말도 잘 들리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이로미는 줄기차게 대화를 이어가면서도 흙가래를 착착 쌓아 뭔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가만히 뒤로 다가가 이로미가 만들고 있던 것을 보던 최현욱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그야말로 초등학생이 애써서 낑낑거리며 빚은 것처럼 올록볼록한 손맛이 그득한 도톰한 접시가 보였다. 그건 그거대로 좋을 것이었다. 프로페셔널한 완성도를 뽐내는 작품 하나보다도, 이 시간이 참여자들에게 기억할 만한 순간으로 남는 것이 그에게는 더 좋았다. 어딘가 서툰 느낌이 잔뜩 묻어나는 저 접시가, 손자국 아래 자신이 했던 이야기들과 더불어 그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었던 사람들의 표정도 함께 기억하리라는 생각에 그는 왠지 크게 소리 내어 웃고 싶어졌다.

서툴게 높이를 쌓아가던 작품들을 빚던 수강생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그를 쳐다보았다.


“…?”


당황한 그가 그들을 마주 보며 순간 멈칫거렸다. 손안에 쥔 흙을 조물거리던 김은지가 머쓱하게 말했다.


“선생님이 갑자기 활짝 웃으시기에 뭐 좋은 생각이라도 나셨나 해서요.”


기분이 좋아지는 생각을 한 건 맞았지만, 그런 속마음이 얼굴에 온통 새어나갔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최현욱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뇨, 별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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