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안녕하세요, 친애하는 베넷 씨!
롱번의 어느 분께 편지를 쓸까, 제법 많이 고민했답니다. 그곳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아요. 물론 첫 번째로 꼽았던 것은 엘리자베스였지만요, 하지만 저는 결국 선생님을 선택했답니다. 거기엔 딱히 대단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랍니다. 그저 선생님과 제가 결이 좀 비슷하달까, 그런 사소하고도 무게감 있는 착각 때문이지요. 선생님의 시니컬한 유머는 정말이지 제 취향이거든요.
예를 들자면 베넷 부인께서 새로 이사 오는 부자 청년에게 인사를 가라고 부탁 비슷한 강권을 할 때 말이에요, 선생님께서 부인의 미모를 치켜세우는 말씀을 하셨잖아요? 부인은 젊을 때야 그랬을지 몰라도 딸 다섯을 키우는 여자는 미모 가꾸기는 포기해야 한다고 (어쩐지 어깨에 힘이 들어간 어투로) 했고요. 그때 선생님이 하신 촌철살인 한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보통 그런 경우에는, 가꿀 만한 미모가 별로 남아 있지 않겠지." -45쪽
진실로 통찰력 있는 말씀이세요. 다만 그 뼈 때리는 말에 가슴이 조금 아팠던 익명의 독자 1인이 여기 있다는 사실만은 말씀드리렵니다.
제인 오스틴 본인이 자신과 가장 닮은 사람은 엘리자베스라고 했다고 하는데, 저는 오히려 선생님이 아닌가 싶어요. 심지어 선생님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기까지 하고 있단 말이죠?
베넷 씨는 재기 발랄함과 냉소적인 기질, 내성적인 기질, 충동적인 기질이 묘하게 뒤섞인 인물이라, 23년을 같이 산 아내도 베넷 씨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46쪽
정말 여러 번 그렇게 느꼈어요. 선생님을 세상에 내보낸 그분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 문장의 베넷 씨를 그녀의 이름으로 바꾸어 넣어도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어쨌든, 제인 오스틴의 많은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신랄한 풍자와 유머 감각을 또렷하게 살려내고 있는 인물로 저는 선생님만 한 인물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네요. 물론, 선생님은 엘리자베스의 아버지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요.
여하간 그놈의 한사상속인지 뭔지 때문에 선생님의 어여쁜 딸들과 부인은 마치 도박판의 룰렛을 바라보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심정이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그 유명한 첫 문장, 「상당한 재산을 소유한 독신의 남자는 아내가 필요하게 마련이다. 이것은 다들 인정하는 진리입니다.」가 삶의 진리 중 하나로 당당하게 얼굴을 디밀 수 있었겠죠(깊은 한숨). 그러니 애가 닳아 초조하기 짝이 없는 베넷 부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바가 아니나 선생님은 그런 부인에게 꽤 불만이 많으셨던 걸로 보입니다.
선생님의 재산을 상속할 권리를 가진 콜린스 씨가 나타나 느닷없이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했을 때, 부인은 뛸 듯이 기뻐했으나 선생님이 보이신 반응은 선생님답다 못해 코믹하기까지 했거든요.
"중요한 일이 있어서 불렀다. 콜린스 씨가 네게 청혼을 했다는데, 그게 사실이냐?" 엘리자베스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구나. 그런데 너는 거절했다고?"
"네, 거절했어요, 아버지."
"그랬구나. 이제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네 엄마는 네가 이 청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신다. 내 말이 맞소, 부인?"
"맞아요. 리지가 말을 안 들으면 내 다시는 리지를 안 볼 거예요."
"너는 지금 아주 힘든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엘리자베스. 지금 이 시간 이후로 너는 부모 중 하나와 남남이 되어야 한다. 네가 콜린스 씨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네 엄마가 너를 다시 안 볼 테고, 결혼을 한다면 내가 너를 다시 안 볼 테니 말이다." -185쪽
저도 「오만과 편견」을 상당히 여러 번 읽었습니다만, 저를 늘 박장대소하게 만들고야 마는 장면이죠. 너무나 선생님다운 말이고, 화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그러다 방심하고 있는 상대의 정신을 일순간 가격하고야 말죠. 그렇다고 그 방식이 치졸한 것도 아니고요.
그뿐인가요, 마을 근처에 주둔하게 된 부대의 장교들을 보며 열광하는 어린 딸들을 보며 선생님이 남기신 촌평 역시나 부인의 격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잖아요. 하긴 그건 좀 이해가 갔습니다. 껍데기나 반질반질한 장교들을 보고 좋아 어쩔 줄 모르는 딸들에게 멍청하다고 직격탄을 날리셨으니, 그 심정은 백 번 공감합니다만 조금 과하셨던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베넷 부인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하세요? 자기 자식들더러 멍청하다니. 아이들을 흉보고 싶으면 다른 집 아이들이나 흉보라고요." -77쪽
하고 반발하자,
"우리 집 아이들이 바보라면, 내가 모르고 있어서는 안 되잖소." -77쪽
라고 완벽하게 응수하셨죠.
이런 걸 보면 엘리자베스는 정말로 선생님을 닮은 게 맞습니다, 베넷 씨.
그렇다고 이런 일화만 늘어놓고 글을 맺어선 안 되겠죠. 선생님이 매사 비딱하게 상황을 조롱하는 말만 하신 건 아니었으니까요. 엘리자베스에게 해주신 조언은 코끝이 찡해질 정도로 아버지의 사랑과 걱정이 묻어나는 것이었어요. 선생님이 남기셨던 염려 어린 말들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남은 인생을 그 사람과 함께해도 될지를 고민하는 딸들에게도 훌륭한 충고라고 생각해요.
"남편을 진심으로 존경하지 않는다면 행복해질 수도 없고 체면을 지킬 수도 없는 것이 너라는 아이야. 네가 행복해지려면 너보다 훌륭한 남편을 만나야 해. 너처럼 재기 발랄한 아이가 못난 남편을 만나는 것처럼 위험한 일도 없단다." -524쪽
저는 부모의 입장이라서, 선생님의 이 말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너무 잘 알지만 현대의 감수성으로는 조금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어서 제가 조금만 고쳐볼게요. 아마도 선생님은 배우자에게서 진심으로 존경할 만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잠깐의 열정적인 사랑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환멸이 쉽사리 들어찬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남편을 만나라는 것은 내게 있는 인간적 결함을 조금 더 메워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라는 의미일 것이고요. 인간적으로 존경할 만한 사람을 만나서 함께 생을 보내기를 바라는 것, 그게 부모가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조언이자 기원이 아닐까 싶어요.
선생님의 딸들은 다들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잘 살았을 거예요, 베넷 씨. 또 뵈어요. 선생님의 신랄한 유머가 그리워질 그때까지 건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