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당신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꽤 고민했고, 여전히 답을 내지 못했습니다.
이건 어떨까요, 찰나의 각성자 님. 아- 써두고 보니 정말 별로입니다. 무슨 게임 레벨업했을 때 얻는 싸구려 칭호 같네요. 그냥 S씨라 부를게요. 안녕하세요, 편견 가득한 좀생이 S씨.
제가 이렇게 서두부터 빈정거리는 것을 부디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소설의 서두에서부터 당신이 스스로에 대해 전술한 대목을 쭉 읽어가노라면 실로 편협한 밴댕이 소갈딱지의 대표를 맡으셔도 될 정도라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적어도 결말부에 이르러 맹인 로버트가 당신에게 뭔가를 깨우쳐 준 순간, 그 놀라운 찰나를 발견할 수 있을 만큼이나마 마음을 열 수는 있었다는 점에서 이 정도로 끝내는 걸 감사하게 생각하시라고요.
어쩜 세상에, 집을 방문할 예정인 아내의 친구가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라고 해서 마음에 걸린다고 생각하는 건 그나마 양반이더군요. 게다가 아내의 절친한 친구가 이제 막 상처했다는데, 그 소식을 전하는 아내에게 '(이름을 보아하니 유색인종의 이름인데) 그 사람 아내가 니그로 아니야?'라고 물을 수 있는 신경줄은... 대체 뭘로 만든 건가요? 그뿐인가요? 이제 막 인사를 나눈 처지에, 앞이 안 보이는 사람에게 기차에서 어느 쪽으로 앉았는지는 대체 왜 묻는 건가요?
레이먼드 카버는 당신에게 본인이 꽤나 싫어하는 사람을 투영한 게 아닌가 저는 여러 번 의심했습니다. 그 정도로... 당신은 너무나 있을 '법한' 사람인나머지 한 번쯤 스쳐 지나갔으리라는 착각마저 들게 하더군요.
"내 생각을 해서 좀 참아줘. 사랑하지 않는다면, 좋아. 하지만 당신한테도 친구가 있을 거 아니야. 한 명이라도. 그 친구가 찾아온다면 내가 잘 대접하는 게 좋지 않겠어?" 그녀는 그릇 닦는 수건에 두 손을 닦았다.
"맹인 친구는 없어." 나는 말했다.
"다른 친구도 없잖아." -328쪽
제 속이 다 시원하더군요. 안 됐지만 S씨, 당신은 저런 말을 들어 쌉니다. 이렇게 당신들의 대화와, 방백처럼 들리는 당신의 속내를 꾹꾹 참으며 읽다 보면 드디어 아내의 친구이자 맹인인 로버트가 등장하죠. 맹인이지만 놀랍도록 호쾌한 사람이죠. 그런데 당신은 그가 당신의 편견에 부합하는 맹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 데서 미묘한 불편감을 느끼고야 맙니다. 그래요, 이번엔 그냥 넘어갈게요. 적어도 소리 내서 말하는 결례는 저지르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꽤 오래전부터 생각까지 어찌하겠는가, 겉으로 내보이는 태도만이라도 바르게 하자... 주의였는데, 최근 들어 생각이 글러먹으면 태도도 역시 글러먹게 마련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뼈아프게 얻었거든요. 세상에, 이 나이에 말입니다. 이젠 이런 뒤통수 일격을 맞는 깨달음은 좀 졸업할 때도 된 것 같은데, 역시 세상은 만만하지 않더군요...?
그러니까 이런 대목에 이르러...
하지만 그는 지팡이를 사용하지도 않았고 검은 안경을 쓰지도 않았다. 나는 항상 맹인들에게는 검은 안경이 필수품이라고 생각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 사람도 그런 안경을 쓰기를 바랐다. -333쪽
저는 당신이 제 옆에 있었다면 기필코 등짝을 후려갈겼을 거라고 자신합니다. 읽는 사람의 기분을 생각해서 그 뒤로 당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까지는 굳이 여기에 옮기지 않았지만요. 당신의 기분이 불편해지는 것을 고려해서 장애가 있는 사람이 자신의 장애를 감춰줘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나요? 그거 아니야... 제발 멈춰...
게다가 아무리 특이한 손님이어서 접대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온다고 해도 말이죠... 그래서 S씨, 당신은 적당히 눈치를 보다가 TV를 켰단 말이죠. 부인이 화가 나서 펑 터지기 일보직전인 걸 감지하면서도.
부인이 졸기 시작하자 당신은 더더욱 난감해졌죠. 하필이면 채널에서는 별 재미없는 프로그램만 방영되고 있었고. 하지만 로버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난 아주 좋아. 자네가 뭘 보든지 상관없어. 나는 항상 뭔가를 배우니까. 배우는 일은 끝이 없어. 오늘밤에도 내가 뭘 좀 배운다고 해서 나쁠 건 없겠지. 내겐 귀가 있으니까." 그가 말했다. -343쪽
저는 단박에 로버트를 좋아하게 됐습니다. 저는 항상 그랬어요. 자신만의 빛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속절없이 끌립니다. 어쩜 현실의 인간들보다 픽션의 친구들에게 항상 더 끌리는 건 그게 명확히 보여서 그런지도 모르겠고요. 그런데 그의 대단함은 항상 뭔가를 배우려는 그 태도에만 있었던 게 아니었죠.
당신은 때마침 TV에서 흘러나오던 프로그램을 보다 말고 로버트에게 '대성당'이 무엇인지 아냐며, 알량하기 짝이 없는 지식을 총동원해 대성당을 설명하려 했죠. 하지만 정작 금세 벽에 부딪혀 허둥거리게 된 건 당신이었고 로버트는 인내와 너그러움을 발휘하며 당신을 격려합니다. 마침내 대성당이 정말로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이 당신의 역량 밖임을 스스로 인정하게 된 당신에게, 로버트는 함께 대성당을 그려보자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이 짧은 소설의 백미이자 탄식을 뱉게 만드는 결말에 도착하는 거죠.
그렇습니다, 인생은, 사는 건 "IT'S REALLY SOMETHING"에 가닿게 되는 거죠. 제게 「대성당」은 길 가다 마주치는 사람 누구라도 붙잡고 앉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읽어주고 싶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소설의 존재 당위라는 게 있다면, 바로 이 작품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자네 인생에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겠지. 그렇지 않아, 젊은 양반? 그러기에 삶이란 신비롭다니까, 잘 알겠지만. 계속해, 계속 그려봐." -351쪽
로버트와의 만남이 당신의 삶을 크게 흔들어놓았으리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요. 그런 놀라운 에피파니의 순간과 맞닥뜨리는 행운을 모두가 가지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당신은 크게 운이 좋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어요. 오늘만큼은 이렇게 말합니다. 행운을 빌어요, 멋진 깨달음을 얻는 기회를 누리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