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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Aug 14. 2024

평생 단 한 번 읽을 수 있는 책, 이유는

미하엘 엔데, 끝없는 이야기

어찌나 지적이고 고상하며 길기까지 한 이름인지, 한 번 제대로 부르려면 숨을 한 번 들이켜고 불러봐야 할 바스티안발타자르 북스 소년에게.


인사를 적고 도대체 다음 줄에 무엇을 적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한참 동안 화면을 보고 있게 만든 수신인은 바스티안이 처음일 것 같아요. 잘 지냈어요? 아니, 이건 아닌데. 그럼, 요즘은 무슨 책을 읽나요? 이것도 별로인데. 바스티안도 나처럼 등장인물과 함께 살았던 책 속의 친구들을 가끔 생각하나요? 이 정도가 나으려나요.


간단히 말해서 각양각색의 인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너무나 여러 가지 양상의 정열이 있는 것이다. 바스티안 발타자르 북스에게는 그것이 책이었다. -19쪽


라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하는 순간 어떤 사람은 책을 덮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입을 동그랗게 벌린 채로 고개를 1센티쯤 더 들이밀었을 거라 생각해요. 나는 명백히 후자였지요. 「끝없는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의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그건 좀 어딘가 거짓말 같기도 한 진짜 있었던 일이랍니다.

때는 199*년, 모 대학의 도서관 자료실에서 한 마리의 훌륭한 책벌레가 되어 있었던 나는 그날 쓸데없이 묘한 결심을 합니다. 오늘은 자체휴강의 날이다, 라고.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아무리 후회해 봤자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뭐 어쩌겠나요. 그런데 말입니다, 만약 그날이 아니었다면 나는 어쩌면 여전히 미하엘 엔데도, 「끝없는 이야기」도, 바스티안도 여전히 모르는 채로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거든요. 그렇게 생각하면 역시 그날 하루쯤은 수업이고 나발이고 모조리 째는 게 맞는 선택이었던 거라고 정신승리를 하게 됩니다. 정신승리가 뭐냐고요? 자기 합리화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데, 그건 다음 기회에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해요(으쓱).


자, 그러니까.

학생으로서 마땅히 참석해야 할 수업을 빠지고 책을 낀 채 어딘가 틀어박혔다는 점에서 바스티안과 당시의 내겐 분명히 공명하는 지점이 있었어요. 그러니 앞부분을 읽어나가던 내가 얼마나 놀랐을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 책이 환상문학이라는 장르에 내 독서 인생의 2/3를 탈탈 털어 넣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명백히 밝혀놓고 가야 할 것 같아요. 당시의 내게 환상문학이란, 일본식 TRPG의 향기가 폴폴 풍기는... 그런 특색이 아주 뚜렷한 것이었거든요. 물론 그건 그것대로 아주 좋아했지만, 잠시 그 얘기는 옆으로 밀어 두고. 여하간 「끝없는 이야기」는 내게 환상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어준 셈이죠. 수문장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그 길을 다시 돌아가 기웃거리다 보면 어디선가 톡 튀어나와 손을 팔랑팔랑 흔드는 바스티안과 아트레유, 푸쿠르의 모습이 항상 보인답니다.


이건 모조리 공상의 산물일 텐데 어째서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걸까. 그런 생각들을 하며 페이지를 넘겼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해요.


불평에 차서 헐뜯는 투로 아주 일상적인 사람들의, 아주 일상적 생활에서 생겨나는, 아주 일상적인 이야기가 벌어지는 책들을 소년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일은 현실 속에서도 지겹도록 겪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또 읽어야 한담? -43쪽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날 때의 희열이란 엄청나게 짜릿하게 마련 아니겠어요. 바스티안도 물론 알고 있죠? 이 글을 쓰느라 오래된 책을 다시 뒤져보고 있는데,  이 문단에  밑줄은 물론이고 별표까지 쳐둔 걸 발견하고 웃지 않을 수 없었어요. 물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조금 아니 꽤나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사람인지라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두껍게 밑줄을 그어놨는지를 충분히 이해하겠고, 여러 겹의 밑줄에서 몇 개는 살짝 덜어내고 싶어지는 기분만큼 나이를 먹었는가 보다 싶어 쓴웃음이 나기도 해요.


아버지나 어머니, 그밖에 배려를 해주는 누구인가가, 내일 아침엔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이제는 자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불을 꺼버렸기 때문에 이불 밑에서 손전등 불빛에 비추어 몰래 책을 읽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 -19쪽


그러니까 말이에요. 이런 경험이 없는 사람은 어떤 일이 닥쳐올지 뻔히 알아도 그 순간엔 책을 놓을 수 없는 거죠. 그런데 한편으론 요즘은 이게 어떤 느낌인지 아는 사람이 확 줄어든 게 아닐까 조금 걱정스럽기도 해요. 어쩌면 이것마저도 글로 적어서 보존해야 하는, 멸종 위기 직전의 낭만이 아닐까 하는.


그런 차원에서, 독자들이 이야기 속의 세계를 찾아주지 않아서 병든 어린 달님이 그 병을 고쳐주기 위한 구원자를 찾아 세계를 헤매는 모험을 하고 온 아트레유를 치하하는 말은 아주 의미심장하죠.


"모든 일이 헛일이었습니다. 구제의 길은 없어요."
(...)
"하지만 어쨌든 너는 그를 데려왔단다."
"누구를?"
"우리의 구세주를."
소년은 탐색하듯 왕녀의 눈 속을 들여다보았지만 거기에는 맑고 명랑한 기운만 깃들어 있었다. 왕녀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너는 너의 사명을 완수했다. 네가 치른 행적과 고통에 대해 감사한다." -262쪽


아트레유는 자신이 한 일이 없는데 왜 이런 치하를 받는지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죠. 바스티안과 「끝없는 이야기」를 읽고 있는 누군가는요. 등장인물의 숭고한 모험은 독자와 인물의 거리감을 좁히며 인물의 긴박감을 독자의 것으로 전이시키며 마침내 그의 승리를 독자의 승리인 것처럼 합일시키는 순간 의미를 다한다는 것을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아트레유의 모험을 지켜보는 바스티안의 이야기인 동시에 바스티안의 모험을 지켜보는 독자의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늘, 그렇잖아요. 책을 읽는 사람은 그 책을 읽기 전의 그와는 조금쯤 다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죠. 그리고 한 번 읽어버린 그 책은 결코 내가 처음 읽었던 책이 될 수는 없는 법이죠. 그에 대해서는 현명한 코레안더 씨의 조언을 빌어오려 해요.


"환상계에서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비밀이 한 가지 있단다. 너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왜 그런지를 알게 될 거다. 어린 달님한테는 너는 두 번 다시 결코 갈 수 없단다. 그건 옳은 얘기야- 그녀가 어린 달님인 한에서는. 그렇지만 네가 그녀에게 새로운 이름을 줄 수 있으면, 또다시 만날 수 있는 거야. 그리고 네가 그렇게 다시 만날 때마다, 그것은 번번이 처음이자 단 한 번의 만남이 되는 거다." -666쪽


얼마나 현명하고 자애로운 말씀인가요. 아마도 이것이 바스티안의 진정한 아버지이신 미하엘 엔데 선생님이 하고 싶으신 말씀일 거예요. 책을 읽는 일에 관해서는 마치 진리와도 같은 이 말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는 말로 편지를 닫을게요. 또 만나요, 바스티안. 아마 그때는 오늘과는 또 다른 바스티안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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