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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Aug 07. 2024

고통스러운 시절을 버티는 방법

알베르 카뮈, 페스트

Comment allez-vous, 인사를 건넵니다. 인사말이라는 것이 공식처럼 외우기는 해도 맥락의 결이라는 걸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어떻게 지내시나요, 베르나르 리유 선생님. 


저는 오랑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총 두 번 읽었답니다. 한 번은 뭣도 모르는 10대 때, 순전히 나는 이런 책도 읽어보았노라고 뻐기기 위해 하품을 참으며 읽었습니다. 최근엔 도서관에서의 우연한 재회 덕분에 이루어진 다시 읽기였어요. 페스트 못지않은 전염병의 시대를 살아버린 체험자로서, 왠지 「페스트」를 꼭 다시 읽어봐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달까요. 덕분에 이젠 정말 자신 있게 「페스트」를 읽어본 책으로 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왜냐하면 바로 자발적 고독, 비자발적 소외의 시절을 원치 않게 살아본 경험을 갖고 이 텍스트를 다시 읽는 것은, 참담한 현실을 관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장에 내던져지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 들게 했거든요. 


오랑 시의 으슥한 구석들이 죽은 쥐를 토해내기 시작했을 때 불길한 무언가를 감지한 사람도 있었을 테고 별일 아니라며 애써 외면한 쪽도 있었을 테죠. 하지만 특별한 증상을 동반한 죽음이 속출하기 시작하며 페스트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 의사로서 선생님이 어떤 심경이었을지는 아주 대략적으로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선생님, 제 생각에는요, 그래도 재앙을 명명할 수 있다는 데서 날벼락같은 이 사건의 재앙적 카리스마는 조금 덜어지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그 사달이 벌어진 지 80여 년이 경과한 현대의 시선으로 볼 때 그렇다는 의미지만요. 


이름 붙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같은 것을 겪어보아 그 실제를 속속들이 알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규모와 양상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을 때 가능한 행위가 아닐까요. 길고 고통스러운 싸움이 될지언정 위력을 짐작할 수 있는 적과 맞붙는 것은 그래도 미지의 상대가 언제 습격해 올지 몰라 불안에 떨고 있는 것보다 조금은 낫지 않나, 조심스레 생각해 봅니다. 물론 그저 저의 생각일 뿐이니까 너무 언짢게 여기지는 말아 주세요. 사실 최전선에서 싸우는 당사자로서는 이렇게 여유작작한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만요.


그러나 이 현기증 나는 상상도 이성 앞에서는 계속되지 못했다. '페스트'라는 말이 입 밖에 나온 것도 사실이고, 바로 이 순간에도 재앙이 희생자 두서넛을 후려쳐서 쓰러뜨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거야 뭐 중지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인정해야 할 것이면 명백하게 인정해, 드디어 쓸데없는 두려움의 그림자를 쫓아낸 다음 적절한 대책을 세우는 것이다. -66쪽 


이것은 얼마나 이성적이고 교과서적인 판단인지요. 생각하신 것처럼, 


저 매일매일의 노동, 바로 거기에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 나머지는 무의미한 실오라기와 동작에 얽매여 있을 뿐이었다. 거기서 멎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저마다 자기가 맡은 직책을 충실히 수행해 나가는 일이었다. -66쪽


이렇게 일과적인 성실함이 지속되는 한 어떤 전염병도 인간을 완전히 망가뜨릴 수는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면, 제가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일지도요. 저는 매일 조금씩 낙천적으로 행동하며 삶을 이어나가려 하는 사람인지라, 선생님의 생각처럼 매일의 유의미한 노동- 스스로에게 부과한 인간적 존엄을 지키는 행위를 꾸준히 지속하는 인물들에게 절로 존경심이 솟습니다. 


시청 직원으로서 충실하게 행정사무를 보며, 전염병의 수치 통계를 취합하고, '어떤 자그마한 신비의 한구석(70쪽)'을 갖고 있는 듯한 조제프 그랑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고, '아무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기록하는 역사가가 되려고 고심하고 있었던(41쪽)' 장 타루 역시 그러합니다. 또, 페스트에 휩싸인 도시를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음에도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302쪽)'이어서 오랑에 남기로 결심한 랑베르와 리유 선생님, 당신 같은 이들이 아니었다면 도시는 오래도록 더 페스트로 고통받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성실함과 박애, 연민이 인간의 몸을 얻는다면 당신들일지도 모르지요.  


서술하셨듯, 


그는 마치 시청의 자기 책상에 앉듯이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이었고, 소독약과 병 그 자체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로 텁텁해진 공기 속에서, 잉크를 말리려고 서류의 종잇장을 흔들곤 했다. 그럴 때면 그는 말을 탄 여인 생각도 잊어버리고, 오직 필요한 일만 해내려고 고지식하게 애쓰는 것이었다. -203쪽


여러분 각자가 묵묵히 이어나가는 매일의 참혹한 전투는 대부분 지루하고 승리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꺾이지도 않는 그 모습에서 요즈음에는 더더욱 만나기 힘들어진 윤리적 감수성이나 선한 아름다움을 봅니다. 저는 그것을 고결함이라 부르고 싶네요. 


이처럼, 페스트가 우리 시민들에게 가장 먼저 가져다준 것은 귀양살이였다. 서술자가 느꼈던 것이 동시에 수많은 우리 시민들이 느꼈던 것인 만큼, 서술자는 자신이 그때에 느낀 바를 모든  사람의 이름으로 여기에 써도 무방하다고 굳게 믿는다. 그렇다. 그때 우리가 끊임없이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던 공동, 과거로 돌아가고만 싶은, 혹은 그 반대로 시간의 흐름을 재촉하고만 싶은 구체적 감정, 어이없는 요구, 저 불타는 화살과도 같은 기억, 그것이 바로 귀양살이의 감정이었다. -107쪽


이제는 이게 어떤 기분인지 확실하게 압니다. 겪어보았으니까요. 

이 대목은, 체험적 각성이 얼마만큼의 위력을 지닌 것인지를 새삼 깨우쳐 주더군요. 페스트는 맹위를 떨치던 때조차 선생님의 의지를 꺾지 못했는데도, 막상 기세를 꺾고 제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할 시기가 되어서는 선생님께 좀처럼, 어쩌면 평생토록 떨치지 못할 아득한 좌절감을 떠안기는 데 성공하더군요. 그런 것은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실패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건 결단코 아니에요. 하지만 인간적 절망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는 자연- 전염병조차도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니까요- 에는 무릎을 꿇고 굴복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까요. 거기엔 숭고한 아이러니마저 있지 않나 싶고요.


그것은 패배의 침묵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친구를 에워싸고 있는 침묵으로 말하면, 그것은 너무나도 진하고 페스트에서 해방된 도시와 거리의 침묵과 너무나도 긴밀하게 일치하는 침묵이었기 때문에, 리유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결정적인 패배, 전쟁을 종식시키면서 평화 그 자체를 치유할 길 없는 고통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패배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415쪽


그러나 그 자신, 리유가 이긴 것은 무엇이었던가? 단지 페스트를 겪었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추억을 가진다는 것, 애정을 알게 되었으며 언젠가는 그것에 대한 추억을 갖게 되리라는 것, 그것만이 그가 얻은 점이었다. -417쪽     


아뇨, 리유 선생님.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생의 어떤 체험들이 남긴 결정들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야만 건져낼 수 있는 것이니까요. 힘겨운 사투를 함께 해 왔던 벗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는 누구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만요. 지금은 분명 생각이 달라지셨겠지요. 바뀐 생각을 들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깝네요. 


이 책을 다시 읽는 동안 꽤 짙은 피로감을 느끼긴 했지만, 그럼에도 텍스트로써 페스트의 시기를 여러분과 다시 함께 살아본 시간은 즐거웠어요. 이런 말은 실례일지도 모르겠지만요. 참, 잊을 뻔했네요.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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