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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Sep 04. 2024

내게 소중했던 이들을 누군가 또 기억해 주었으면

테레사 데 라 파라, 마마 블랑카의 회고록

안녕, 마마 블랑카.


수많은 친구들 중에서도 유난히 늦게 만난 축에 속하는 당신이지만, 사람의 사귐에 시간이 길고 짧은 게 결코 대단한 건 아니더라고요. 언제 만났느냐보다도 훨씬 중요한 건, 그 사람과 만났을 때 나의 어떤 부분과 공명했느냐인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늦게 만나게 되었어도 제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거죠. 그건 이 대목을 만났을 때 확신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화초를 꽂아두던 오래된 도자기 꽃병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깨지자 그녀는 깨진 윗부분을 적당히 가린 다음, 스코틀랜드산 실크 스카프로 둘러 단단히 묶었다. 그러고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유심히 살펴보더니 잘못한 부분에 대해 언급하면서 꽃병에게 상냥하게 물었다.

"아이, 가엾어라. 머리가 아프니?" -19쪽


저 역시도 살다 보면 일어나는 자그만 사고나 당혹스러운 순간들에 마주칠 때마다 누군가는 우스꽝스럽게 여길지도 모를 이야기를 갖다 붙이는 버릇이 있으니까요. 그중에서도 실제로 효과가 좋았고 저 스스로도 여전히 기억하는 에피소드는 이런 거예요. 딸이 어렸을 때 좋아하던 옷의 단추가 떨어졌을 때 나달거리던 단추를 그네 삼아 타고 놀던 요정이 마음에 들어 떼어갔을 거라고 둘러쳤더니(이걸로 짧은 이야기를 쓰기도 했죠) 아이 눈이 동그래지면서 징징 짜던 것도 잊었던 일이죠. 그래서일까요, 초반부의 저 이야기를 읽는 순간 이 사람과 나는 결이 같구나, 생각할 수밖에 없었어요.


마마 블랑카, 혹은 블랑카 니에베스. 요즘은 말이에요, 당신과 이 이야기를 풀어놓은 화자가 그랬던 것처럼 나이를 뛰어넘은 우정 같은 걸 맺는 건 거의 불가능한 시대랍니다. 아이들은 너무 바쁘고 노인들은... 음, 글쎄요. 그냥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이를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먹었을 때, 당신 같은 우아하고 재미나게 들려줄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많은 할머니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요. 당신의 유년시절을 풍성하게 해 주었던 그 많은 사람들, 유쾌하고 재치 넘치는 이들이 있었기에 블랑카 니에베스는 대문 안쪽을 기웃거리던 어린 여자아이를 너그럽게 불러들이는 어른이 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요.


마마 블랑카는 이야기를 하면서 무언가를 자아내는 데 뛰어난 재주가 있었고, 아무 직업도 없는 예술가들처럼 혼돈스럽고 범신론적인 영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언제든 그녀를 따라 흥미로운 감상적 순례를 떠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마마 블랑카는 언제나 나를 즐겁게 해 주었다. 바로 그게 내가 이기적인 애정을 가지고 계속 그녀의 집을 방문한 이유였다. -16쪽


아이들이 이렇게 자랄 수 있으면 참 좋겠어요. 생의 경험이 풍부하고 온갖 사람들을 다 만나왔던 어른들로부터 실제로 그들의 삶에 존재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좋겠어요. 그런데 사실, 저만 해도 어릴 때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어요. 어릴 때는 몰랐는데, 이 대목을 읽다 알아차렸지 뭐예요.


그녀는 자신의 영혼을 통해 선량한 마음씨와 즐거움이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설탕과 소금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다정스레 모든 것을 조롱했다. 그래서 그녀는 매사에 선량함과 즐거움이라는 두 알갱이를 넣었다. -19쪽


즐거웠던 이야기를 하니까 듣는 사람도 즐거웠던 거예요. 좋은 사람을 추억하면서 하는 이야기는 즐겁잖아요. 그런 기분이 전해지지 않을 리가 없죠. 반대로 자신이 우월하고 대단했다는 얘기를 그 누가 뭐 얼마나 공감하면서 들을 수 있을지는 그을쎄에요...


당신의 유년기에 살았던 비범한 사람들을 만나는 건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그들을 추억하는 글 속에서 생동감 넘치던 모습을 그대로 살려 묘사해 보려던 당신이 번번이 좌절했을 모습이 절로 그려져요. 마침내 이렇게 말하고 말았잖아요.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비센테가 어떤 식으로 말했는지, 그리고 엄마가 어떤 식으로 말했는지, 이 두 극단을 여러분에게 설명해 보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촌스럽고 소박한 자연미의 극치와 감칠맛 나고 정교한 '세련미'의 극치. 하나는 음악적이기보다 리듬감이 살아 있고, 다른 하나는 리듬감이 있다기보다 음악적이다. 나는 좋은 의도가 만들어낸 불행을 서글픈 마음으로 생각해야만 했다. 거듭 말하지만, 이에 비해 글로 쓰인 말은 시체나 다름없다. 지금처럼 위대한 발명과 엄청난 기술혁신이 매일같이 이루어지는 시대에 왜 작가들은 그 시신에게 '당장 일어나 걸으라'고 말할 방법을 찾지 못한 걸까? -137쪽


그러게요, 마마 블랑카.

그런데 그건 아마, 저도 확신은 못하겠지만- 그게 작가의 일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낱낱의 글자와 단어를 모아 생동감과 생생한 존재감을 불어넣어 문장 사이로 일어나 움직이게 하는 바로 그 일이요.

하지만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 분노와 좌절 사이로 그분들의 어조와 말투가 충분히 짐작 갔거든요. 당신의 속상함을 토로한 것만으로도 비센테와 당신의 어머니가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사람이었는지, 그래서 궁극적으로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알 것 같거든요.


좋은 어른들이 있어서 당신의 유년이 따스한 봄날 같았을 거라고 상상했어요. 비록 자매들과 드잡이질을 하며 싸우는 날들이 태반이었다고는 해도 그 역시 좋은 추억이라는 걸 지금은 알 테죠. 그리고 추억은 추억으로만 남기는 것이 좋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던 그날, 당신은 조금쯤 어른이 되었을 거라고 짐작한답니다.


엄마의 말이 옳았다.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면 살면서 끊임없이 변해가는 사물이나 존재 위에 경솔하게 올려놓으려 하지 말고, 우리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해야 한다. 기억은 변하지 않지만, 변하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229쪽


그리고 당신이 집안으로 초대해 주었던 어린 소녀의 유년시절에도, 당신이 각인되었을 거예요. 틀림없이.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이미 돌아가신 분들이 당신과 함께 한 번 더 죽는 것만큼은 견딜 수 없다고 그들에 대한 꼼꼼한 기록을 남겨 전하는 사람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게다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종종 들려주던 친절한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지 않을 방법 같은 게 있을 리 없잖아요.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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