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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Sep 11. 2024

환상의 세계에도 사람은 살고 있고

오트프리트 프로이슬러, 크라바트

안녕, 크라바트.


우리가 알고 지낸 게 얼마나 됐죠? 지금 대강 헤아려봤는데, 놀랍게도 족히 30년 가까이 된 것 같더라고요.

코젤브루흐의 마법사의 방앗간에서 무사히 탈출했으니 지금은 당연히 아주 잘 지내겠죠. 하지만 종종 생각해요. 그곳에서의 경험이 없었다면 아마도 지금의 크라바트는 없었을 테고, 크라바트가 없었다면 환상문학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였던 나 역시 없었을 거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이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준 오트프리트 프로이슬러에게 한 잔 바치고, 이 책을 사주었던 나의 어머니께도 브라보.


어쩌다 보니 아이들의 독서 편향이랄까, 책 취향에 대해서 경험치를 제법 쌓게 되었거든요. 그런데 재미있는 경향성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더란 말이죠. 어떤 아이들은 환상문학을 최고의 책으로 친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아이들은 세상의 어떤 책들도 참고 견디며 읽을 수 있지만 환상문학만큼은 참아줄 수 없는 허황된 허튼소리라고 여겨요. 저는 이 간극이 너무도 흥미로워요. 단순히 어린 시절의 경험 탓이라고 치기에는, 환상문학을 제법 읽고 접하고 자랐음에도 기어코 그 세계에서 멀어진 아이가 우리 집에도 하나 있기 때문이에요. SF 소설을 쓰는 아주 유명한 어떤 분이 이 비슷한 얘기를 했어요. 환상문학이든 SF든, 가상의 세계에서 삶의 본질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그 경계를 넘어가기 힘들어할 때를 보면, 아주 가끔은 안타까워요. 저기만 넘어가면 정말 멋진 이야기의 풍경이 기다리고 있는데 조금만 더 힘내주지- 싶은 마음이랄까요.


어쨌건 나는 전자에 속하는 어린이였으니까, 검은 물이 흐르는 강 옆의 방앗간과 그곳에서 악마와 계약한 주인이 열두 명의 도제를 거느리고 있다는 암시를 불길한 안개처럼 뿌리는 이야기에 홀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죠. 이제 갓 도제로 입문한 당신이 매해 누군가는 제물로써 목숨을 잃어야 하는 규칙이 있는 이곳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면서.


아이로서 이 책을 읽었을 때에도 어른이 되어서 거듭 읽을 때에도, 낯선 환경에 떨어진 아이에게 믿고 기댈 수 있는 어른- 혹은 멘토의 존재가 얼마나 따뜻한 것인지를 새삼 실감하면서요.


소년은 멍하니 식탁만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혹은 관심이 없는 체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소년이 고개를 들자 톤다가 건너다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보일 듯 말 듯한 움직임이었지만 소년은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이런 방앗간에서 지내려면 친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소년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23쪽


아까 그랬잖아요. 이 책을 꽤 오래전에 처음 읽었다고요. 아이들은 대체로 어른들이 하는 말은 그다지 귀 기울여 듣지 않죠. 나만 해도 그랬으니까 뭐 할 말은 없다지만.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가 좋아하게 된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조용히 말을 듣게 되잖아요. 내게 그런 사실을 일깨워준 대목이, 여기에서도 발견되더라고요. 신기하게도요.


"하지만 그렇게 취급하잖아요!" 크라바트가 소리쳤다.
"날 눈먼 바보로 취급해요 - 이젠 정말 지긋지긋하다고요!"
"매사에는 적당한 때가 있는 거야." 톤다가 조용히 말했다.
"너도 곧 모든 것을 알게 될 거란다. 주인과 이 방앗간에 대해서 말이다. 그날, 그 시간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빨리 올 거야.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렴." -49쪽


신중하고 사려 깊은 톤다의 말이 정말 옳죠.

그날, 그 시간이 어디 비밀을 알게 되는 순간뿐일까요. 내게 닥쳐오리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삶의 모든 찰나가 그렇지 않던가요. 모든 순간은 내가 예상하던 것보다 빠르게 닥쳐옵니다.

열아홉인 딸아이가 그래요. 인생 참 짧다, 순식간이다. 내가 이렇게 빠르게 10대를 졸업하는 날이 코앞에 올 줄은 몰랐는데, 라고요. 나는 10대의 마지막 해에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이제 드디어 20대에 들어서는구나 신나라 하기만 했기 때문에 이런 반응이 좀 신기하긴 했습니다만 아무튼 말이야 맞는 말이죠.


"보답?" 크라바트는 손사래를 치며 대답을 대신했다 - 그러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나한테 톤다와 미할이라는 친구가 있었어. 모두 죽었지. 때가 되면 그 친구들에 관해 이야기해 줄게. 그때 네가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준다면 보답은 그것으로 충분해." -232쪽


그리고 인생은 예고 없이 내게서 중요한 것들을 빼앗아 갑니다. 어떤 때에는 재앙처럼, 어떤 때에는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상실에 대처하는 어른의 방법을, 어렸을 때는 미처 의식조차 못 하고 있었지만 이런 순간순간의 짤막한 대화에서 배웠었던가 봐요. 나 역시도 가까운 이들의 상실을 겪고 나서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이런 사람이 있었어. 이런 것을 좋아했고 저런 것을 잘했지. 그 사람이 있고 없을 때의 세상은 요 정도의 차이가 있었던 것 같아, 그 사람은 나한테 이런 걸 가르쳐 줬었는데, 하는 식으로 이야기하면서요. 그러니까 당신에게 톤다가 있었던 것처럼 조금 방식은 다르지만, 내게도 어떤 '문'을 열어젖혀주었던 은인이 있었어요. 이 책을 다시 읽으며 새삼 내게 생겨난 상실 덕분에, 당신의 마음을 조금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던 듯도 싶네요.


아, 마지막으로요. 한창 이성이니 연애의 감정이니 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꼬맹이는(지금의 시선으로 꼬맹이인 것이지, 당시에는 '다 컸지 뭘'이라고 어깨 힘 빡 주고 다닌 나이였다는 걸 첨언합니다) 당신의 칸토르카의 말 한마디로 사랑의 일면을 조금 엿봤다는 추신을 남깁니다.


"나를 걱정하기 때문에 두려워한다는 걸 말이에요. 그 때문에 당신을 알아본 거예요." -337쪽


나한테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애틋한 사람이 죽음의 위기에 놓였을 때조차, 그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함을 감당하는 일마저 사랑의 한 일면이라는 것을 "..." 하는 감정과 함께 깨달았다면 너무 조숙했나요? 그런데 그 나이 때는 원래 좀 그런 거 아니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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