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은, 메르시 크루아상
살뜰하고 정다운 일상. 이 책을 처음 집었을 때의 인상이 그랬고, 덮은 뒤의 지금 감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지은 작가는 생활 미술과 해당 분야의 문화사 전문가로 원체 네임드셔서, 처음엔 설마 이 저자가 그 저자일까 그냥 동명이인이겠지 싶었는데 어쩐지 '프랑스'가 들어간 부제를 보니, 동일 인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더라. 아닌 게 아니라 역시, 이분이 그분이었다.
프랑스에서 심지어 쿠킹 클래스를 운영하고 계시기도 하시다니 요리와 식문화에 대한 이분의 열정은 진짜배기일 것.
본인이 주로 드나들이를 하시는 파리의 알리그르 시장D'Aligre Market 단골상점들을 하나하나 소개하면서 함께 프랑스의 소박한 생활 문화를 조금씩 이야기하는데 이게 또 굉장히 재미있다. 아무래도 나도 직접 장을 봐서 삼시세끼 밥 하는 게 제일 힘들고 한편 즐겁지만 어떤 순간에는 포만감 제공 캡슐의 개발을 목놓아 기다리기도 하는 소위 가정주부로서,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대목이 있는데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이곳에서는 상인이 물건을 집어주는 게 디폴트라든가(상호 신뢰가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행위 아닌가) 껍데기고 뭐고 다 벗겨 놓고 팔면 뭐가 뭔지 소비자가 믿을 수 있겠냐며, 닭집에서는 털만 뽑고 대가리와 발은 그대로 붙여둔 닭들을 진열대에 주르륵 걸어 놓는다는 거!! 이것이 하이라이트였다. 정육점과 닭집이 따로 있다는 것도 아주 사알짝 문화 충격이었는데 닭을 품종별로 구분하고 신뢰를 주기 위해 몸통 털만 쏙 벗겨 놓은 뒤 걸어 놓은 닭들의 적나라한 모습이란... 참, 와일드하다. 터프한데 멋있긴 했다. 그렇게 닭 품종이 많은 것도, 심지어 닭 전문가가 '롤스로이스'라고 칭할 정도로 끝내주는 맛의 닭 품종이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된 건 대단한 수확이랄까. 게다가 치즈도 제철이 있는 식품이란다. 소젖 치즈와 염소젖, 양젖 치즈가 맛있는 계절이 각각 다르다고. 확실히 세상은 넓고 내가 아는 건 빙산의 일각의 일각도 안 된다는 걸 알게 되어도, 역시 이런 걸 알게 되면 즐겁다.
게다가 이 시장이 생겨난 건 무려 정조가 등극했을 때라고 하니 그 역사를 알만하다.
우리나라에도 시장이 많이 남아있긴 하지만, 갈수록 그 규모가 줄어들고 있어 아쉽다. 한편으로는 미식의 나라 프랑스에서조차 직접 음식을 해 먹는 인구가 줄어가고 그 과정조차 단축되는 경향이 심화되고 있으며 시간을 들여 조리해야 하는 식자재의 판매율이 저조하다고 하니, 간단히 먹고 치우는 게 시대의 경향성이긴 한가 보다.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도 간혹 밀키트를 찬양하며 깊이 의존할 때가 종종 있긴 하지만, 그래도 맛있는 음식을 손수 조리하여 누군가와 나눌 때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풍스러운 건물과 에어컨은 새와 고양이처럼 양립할 수 없는 사이다. 벽에 구멍을 내고 실외기를 바깥에 매다는 순간 파리의 멋진 건물들은 끝장난다. (...) 다들 예찬하는 파리의 멋진 풍경 뒤에는 선풍기로 더위를 쫓는 파리지엔들의 고통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57쪽
물을 튕기며 날아오르는 물고기 떼처럼 살아 숨 쉬는 말들이 빵집에 활기를 불어 넣을 때면 프랑스에서 가장 복잡하고 큰 도시 파리는 일시에 작은 시골 마을이 된다. 매일 카운터 뒤에서 그날그날 똑같은 얼굴을 맞이하면서 싸락눈처럼 조금씩 조금씩 친근감이 쌓인다. 몇 시에 빵을 사러 오는지, 아이가 있는지, 어떤 빵을 좋아하는지... 수많은 개인의 역사가 빵집 계산대 위를 스쳐 간다. -105쪽
프랑스인들이 자주 쓰는 맛 표현 중에 '라피네 raffine'라는 단어가 있다. 정제된 섬세함이라 할 수 있는 라피네는 미식가들을 위한 고급 요리를 예찬할 때 자주 쓰는 말이다. 그런데 프랑스인들이 그토록 예찬하는 요리의 섬세함이란 수많은 향신료를 얼마나 조화롭고 창의적으로 쓰는가에서 온다. -2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