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앙 보뱅, 마지막 욕망
기나긴 연휴의 후유증은 두텁게 오래 갔다. 간신히 회복하고 있는데 다음 연휴가 또 기다리고 있군. 내게도 연휴를 달라...
크리스티앙 보뱅을 어떻게 접했던가. 별로 믿음직하지는 못한 기억에 기대어보자면 그건 아마도 이제니 시인이나 김연덕 시인의 산문집 덕이 아니었던가 싶다. 제일 처음에 읽었던, 「환희의 인간」이 너무나 좋았어서 국내 번역 출간된 보뱅의 책을 모조리 검색해서 확인하다가 나는 조금 당혹스러워졌다.
몇 년 전까지 기대되는 + 읽어보고 싶은 신간을 쭉 목록을 만들어서 그저 어떤 책일 것 같다는 짤막한 기대치만 적어서 서재 블로그에 쓰곤 했었는데, 크리스티앙 보뱅의 책을 링크해 두곤 아래와 같은 토막글을 끼적여 놓은 것을 발견했다... 알라딘은 왜 본인이 쓴 글을 제일 먼저 적나라하게 다 보여주는 것인가... 여하간, 매주 거의 10권 이상의 관심신간을 정리해 놓곤 했었는데 사실 그러고도 막상 다 읽지는 못했다(당연한 말을). 그런데 몇 년이 지나 내가 이미 이 사람의 작품에 한 번 시선을 두고 간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미묘한 감정은 뭐라고 설명을 잘 못 하겠다.
산문집이라는 장르가 갖는 정서적 품이 어느 정도 되는 걸까 문득 알고 싶다.
어떤 책들은 그저 개인사의 토로에 지나지 않기도 하고(개인사가 가치가 없다는 게 아니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그걸 도무지 모르겠는 책들이 의외로 많다는 의미다) 어떤 책들은 그냥 산문집이라고만 부르기엔 너무 아까운 것 아니야, 이런 마음이 절로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를 늘어놓기는 매한가지인데 어떤 글들은 오랫동안 몸속에 머물러 이곳저곳을 흔들어 깨워놓고 홀연히 떠나기도 한다. 작가가 시인이자 에세이스트라고 하는데, 전혀 아는 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그런 책일 것만 같다.
여하간, 어제부로 간신히 다 읽은(정말로 인내심이 극강으로 필요했다...) 책은 기대치를 적어놓은 그 책은 아니고 다른 것.
어떤 면에서 힘들었느냐...
비유와 사색을 오가는 문장도 읽기 쉽지는 않지만, 결정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사람마다 다르겠으나) 화자에게 이입할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대체로 한 권의 소설에는 여러 명의 등장인물이 나오게 마련이고, 꼭 화자가 아니어도 독자 자신이 감정이입할 수 있는 인물이 아예 없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일종의 회고이자 고백록이고 유서이기도 해서 화자가 떠올리는 '당신' - 즉 헤어진 연인 말고는 딱히 인상적인 등장인물이 나오지 않는다. 달리 말해 화자에게 공감한다면 깊숙이 읽을 수 있는 이야기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야기의 줄기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꽤 벅찰 수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나는 후자의 독자에 속했다. 사랑에 나 자신을 그토록 다 내어주다니, 나처럼 자신이 제일 중요한(...) 극한 이기주의자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그런 경지인 것이다...
사랑이 뭔데, 그까이거 뭐라고 자살까지 하는데... (10대 때에도 줄리엣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1인이었음) 하지만 이것은 섣부른 독단이겠지. 그런 사람도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문학이 증명하지 않았던가. 내가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런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 그게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큰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다.
각설하고 그 모든 (독서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한 데에는, 작가에 대한 개인적인 극호의 감정과 일말의 팬심도 있었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첫 문장과 그 뒤를 잇는 반전 덕이 아니었나 한다.
좋아했던 오래된 책들의 페이지를 열 때 당신이 준 철필을 사용했다. (그렇군)
지금 그 철필로 천천히 내 정맥을 연다. (아 예...) -10쪽
(1초 뒤) 잠깐만요,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러니 도대체 이게 무슨 사정인지 앞으로 뭐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있나? 독자를 후킹하는 오만가지 문장을 다 봤지만 이건 금메달을 걸 만한 서두라고, 자신 있게 단언하겠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드라마틱한 플롯을 쫓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화자의 내면과 기억과 자의적인 해석이 덧붙여진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정맥을 열었는데 오죽하겠습니까) 소설이므로 남은 이야기들이 시작 부분과 같은 강렬한 사건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의 내면의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인간이 겉보기와 다르게 얼마나 다층적이고 두터운 감정의 상흔을 안고 사는 존재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달까. 그러니 한 사람의 인간이 다른 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순식간에 쌓이는 오해 속에 타인을 묻어버리는 일도 그리 드문 일이 아님도 함께.
투명성에 대한 약속, 모든 생명을 향한 순수한 신뢰, 너무도 강한 당신의 포옹...... 당신은 내 안에 뿌리내렸고, 나는 내 안으로 깊이, 더 깊이 파고들었다. 진흙으로 빚은 검은 빵과 물은 당신 안에서 솟아나 넘쳐흘렀고, 당신 손가락의 잎사귀와 당신 팔과 다리의 나뭇가지 속에서 부드러운 어루만짐으로, 연한 잎맥으로 자라났다. -29쪽
사랑은 내가 가장 좋아했던 하루의 첫 순간, 새벽이라고 불리는 지속되지 않는 시간에 대한 가슴 떨리는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새벽. 달과 태양이 인장을 교환하는 시간. 억압과 냉혹함, 힘들이 부재하는, 부서지기 쉬운 은총의 순간. -67쪽
지난밤을 떠올렸다. 그 밤에 나는 괴로워했고 웃었다. 내 입술을 바싹 마르게 하면서도 외부에서 오는 모든 침해로부터 나를 보호해 준 당신의 부재라는 이 작열감. 그것을 당신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같이 살지 않았지만 함께 있었다...... -81쪽
도대체 이 소설에 대해서 뭐라고 이야기를 덧댈 수 있을까. 도저히 모르겠다. 충격적인 저 첫 문장은 마치 잘 벼린 칼날처럼 들어와, 마지막 호소를 피부에 새겨 넣은 채 매끄럽게 반대편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최근에 어딘가에서도 쓴 얘긴데, 나는 웬만한 로맨스에는 눈도 깜짝 안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다 읽은 다음에는 숨이 찼다. 아예 이 책을 읽지 않았으면 어땠을까를 생각했다.
죽음을 곁에 둔 화자가 몽상과 환상을 번갈아 걷다 마침내 마침표에 도달하려는 순간에서 책장이 닳아버리는 까닭에 언제까지고 이것은 현재진행형의 이별, 멈추지 않고 흐르는 피로 상징되는 사랑의 이야기로 기억될 것이라는 생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