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화 Dec 11. 2024

우정에 대해 말하고 싶을 때

엘윈 브룩스 화이트, 샬롯의 거미줄

아마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친구를 가졌을 샬럿, 안녕. 


내가 너를 알고 지낸 지가 얼마나 됐을지를 잠깐 헤아려봤어. 와, 생각보다 엄청 길더라. 사실 너와 윌버의 이야기를 처음 읽게 된 게 썩 그리 좋은 타이밍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해. 어떻게든 영어라는 언어와 친해져야만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전에는 영어를 퍽 좋아하는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 언어에 포위당해 살아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되니 어찌 그리 꼴도 보기 싫은지. 그럴 때 읽게 되었거든. 


엄밀히 말하자면 그때 ESL 담당 선생님이 읽게 시키셨어. 이건 쉽게 읽을 수 있을 거라면서. 그리고 아주 재미있다면서. 반항미 뿜뿜한 틴에이저 중딩이는 내가 이런 유치 찬란한 애들 책을 읽어야 하는 거냐며 (당연히 속으로만) 반발했지만 다 읽고 소감을 들려달라는데 뭘 어쩌겠어. 읽어야지. 물론 그때는 「Charelotte's Web」으로 읽어야 했지만. 그나마 멋진 삽화가 있어서 으응 그렇구나, 그런 이야기구나. 그런 식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한 줄 한 줄 힘겹게 읽어나간 기억이 지금도 선명해. 다 읽은 뒤엔 당연하게도 눈이 새빨갛게 부었지. 지금은 감수성이 현저하게 떨어졌지만 그때만 해도 아니었거든. 


책을 돌려드리러 가니 선물이라고 주시더라. 소감도 빠지지 않고 물어보셨는데, 당시 ESL에 있던 학생답게 나는 달랑 한 줄로 감상을 표현했어. wept a lot. 선생님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I know, 하고 너그럽게 웃으셨지. 그렇게 샬럿, 너는 오랫동안 내 책장의 친구로 머물렀어. 근데 몇 번의 이사를 다니면서 어디로 간 걸까, 너는. 


아무튼 너와 윌버의 이야기는 뭐랄까, 우정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모범적으로 설파하는 이야기 같다고 비딱하게 생각하면서도 훌쩍대면서 눈을 콕콕 찍어내게 하는 뭔가가 있었지. 


"친구를 원하니, 윌버? 내가 네 친구가 되어 줄게. 하루 종일 너를 지켜봤는데 네가 마음에 들었어." -44쪽


내가 친구를 사귀는 방식이 어땠더라.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나마 가장 비교적 근래라고 할 만한 -오프라인에 한정해서- 기억을 떠올려보면 서로를 관찰하듯 지켜보는 시간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해. 네가 윌버를 하루 동안 지켜봤던 것처럼. 

내가 5년 전 잠시 지냈던 곳에서는 아이들을 반드시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리러 가야 했거든. 원하든 원치 않든 다른 학부모들과 안면을 익힐 수밖에 없었지. 그런데 그중에서도 유난히 내게 시선을 주는 듯한 사람이 있었어. 기분이 나쁘진 않았지. 나보다 열 살은 족히 어려 보이는 블론드의 미인이 눈이 마주칠 때마다 사르르 웃어주는데 기분이 나쁠 게 뭐가 있었겠어. 충분히 탐색전이 끝났다 싶었는지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내 옆에 와서 슬쩍 인사를 건네더니 느닷없이 선명한 우리말로 이렇게 말하더라고.


한국 어디서 오셨어요? 


알고 보니 그 사람은 한국사를 전공한 러시아인이었어. 한국 근현대사를 전공했기 때문에, 그 시기의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아는 게 많은. 참 신기하지, 한국인이 나밖에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중에서 나를 콕 짚어 친구가 되고 싶어 했다는 게. 그런데 친해지고 보니 우린 정말로 통하는 게 많았어.

샬럿, 너도 그랬을 것 같아. 네가 있던 헛간에는 눈길을 끌 만한 동물이  윌버만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너는 윌버와 친구가 되고 싶어 했지. 잠시의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상대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건가 봐. 


"글쎄, 넌 그렇게 말할 수 없어. 너한테는 누가 먹이를 날라다 주잖니. 하지만 나한테는 아무도 먹을 것을 주지 않아. 나 혼자 먹을 것을 찾아야 돼. 굶주리지 않으려면 약고 영리해져야 해. 늘 이모저모 생각하고, 잡을 수 있는 건 잡고, 걸리는 건 먹어야 해. 하필이면 잡히는 게 파리와 곤충과 벌레뿐이라서 그렇지." -56쪽


하지만 친구라고 해서 항상 의견의 일치를 보는 것도 아니고, 상대를 속속들이 파악해서 배려하는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긴 해. 그럴 때 너는 정확한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대화를 정리하는 지혜를 발휘하지. 나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 친구가 감정을 실어 비난하듯 말하는 일에 대해 그렇게 담백하게 반응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인데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느라 다시금 이 이야기를 읽어나가다 그런 생각을 했어.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결핍돼 있는 이런 태도가 아닐까. 감정을 자극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들었더라도, 최대한 사실에 근거해서 단정하게 반응(혹은 반박)하는 거. 물론 말처럼 쉽지 않은 알지만. 그래도, 무엇이 바람직한지 되새기는 자체는 몹시 필요한 일이니까. 


"그건 내가 거미줄을 짜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고 긴 시간을 가만히 앉아 있는다는 뜻이야. 나는 척 보면 좋은 걸 알아보는데, 내 거미줄은 좋은 거야. 난 가만히 앉아서 무언가 나타나기를 기다려. 내겐 생각할 시간이 되거든." -85쪽


'정착성' 거미 샬럿, 사실 나도 지독한 정착성 기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대목에선 그냥 웃어버렸어. 아마도 너는 윌버가 네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성실하게 경청해 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네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겠지. 시간이 갈수록 뼈저리게 느끼는 건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노출해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더라고. 언젠가는 내가 말했던 이 사실들로 이 사람이 나를 약점 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요즘 사람들이 다들 떠안고 있는 고민이기도 해서. 그런데 우스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결코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없다는 거지.


"너는 내 친구였어.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이야. 내가 너를 좋아했기 때문에 거미줄을 짰던 거야. 어쨌든, 어쨌든 말이야, 산다는 건 뭘까? 이렇게 태어나서, 이렇게 잠시 살다가, 이렇게 죽는 거겠지. 거미가 모두 덫을 놓아서 파리를 잡아먹으며 살기는 하지만, 알지 못할 게 있어. 어쩌면 난 널 도와줌으로써 내 삶을 조금이나마 승격시키려 했던 건지도 모르겠어. 어느 누구의 삶이든 조금씩은 다 그럴 거야." -216쪽


잘 자란 포동포동한 돼지들이 대개 그렇듯, 누군가의 식탁에 오를 운명이었던 윌버를 위해 네가 짧은 생애를 던져 만들어냈던 역작들은 조금 철딱서니 없고 귀여운 돼지 한 마리를 살렸고 그 돼지를 키운 가족들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었지. 


산다는 게 뭔지는 나도 모르겠어, 샬럿. 그런데 이거 하나는 알 것 같아. 꼭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하지 못했어도, 누군가를 통해 내 삶을 승격시키지는 못했어도 세상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건 썩 괜찮은 삶이라는 거. 이 사랑스러운 세계에 사는 수많은 존재들 중 누구에게도 해악을 끼치지 않았다면 그것도 정말 대단한 일이라는 걸 최근에 알게 됐거든. 


근데 나 이거 하나는 으스대고 가도 되니, 샬럿? 너를 알고 난 이후에 놀랍게도 난 단 한 번도 거미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어. 어쩌다 집에 들어온 작은 거미조차도 조심조심 잡아서 꼭 밖에다 놓아준단다. 가족들은 내가 거미는 사람에게 대체로 크게 해를 끼치지 않으니까 그러는 거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너 때문이야...... 



http://aladin.kr/p/sLDdA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