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미 도미히코,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
안녕하십니까, 군.
대저 서간문이라 함은 수신자가 명확한 법입니다. 매주 꼬박꼬박 편지글을 쓰면서 단 한 번도 고민해보지 않았던 문제에 부닥쳐서야 저는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에라이, 수신인을 지금이라도 바꿔 버려(책을 바꿔)? 이런 황당한 고민을 하게 한 이유는 바로 귀군의 이름이 단 한 번도 호명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시점이 일인칭으로 흐르는 소설이 많기도 많은데, 1인칭 주인공 시점의 화자 이름이 끝끝내 밝혀지지 않은 소설이 이것 하나뿐일 리도 없는데, 어째서 지금 이 찰나만큼은 이 책이 유일하게 주인공의 이름이 미스터리로 묻혀있는 단 한 권처럼 느껴질까요. 그건 아마도 제가 몹시도 절박하고 당혹스럽기 때문일 겁니다. 제-길.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리하르트 바그너적 라이트모티프leightmotif를 기막히게 활용하고 있는 귀군의 창조자이기도 한 모리미 상이 만들어 낸 기기묘묘한 인물들 중 한 사람이 군을 부르는 호칭을 따서 저도 그리 부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귀군, 요즘은 좀 어떠십니까? 이제는 '이성과의 건전한 교제, 학업 정진, 육체 단련 등 사회에 유익한 인재가 되기 위한' 포석을 닦는 일에 좀 몰두하고 계십니까? 당연히 그러시리라 믿습니다. 아무리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지만, 같은 일을 네 번씩이나 거듭 겪으며 사람이 바뀌지 아니하면 상황이 아무리 달라져봤자 겪는 일의 본질이 달라질 리 없다는 엄정한 사실을 체득했으니 물어볼 필요도 없이 건실한 청년으로 거듭나셨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혹여 득도한 나머지 시모가모의 덴구의 제자로 들어갔다든가 한 것은 아니겠지요. 정신 똑바로 차리셔야 합니다. 제가 나름 그 작가의 전작주의자로서 하는 조언인데, 모리미 세계관의 인물들은 까딱하면 순식간에 교토 곳곳에 포진한 세계의 틈으로 빨려 들어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단 말입니다. 명심하세요, 아시겠습니까?
좌우지간에,
갓 태어났을 무렵의 나는 오히려 순진무구함의 화신이었고, 갓난아기 시절의 히카루 겐지 저리 가라 하는 사랑스러움, 사념이라고는 터럭만큼도 없는 해맑은 미소가 고향 산천을 사랑의 빛으로 가득 메웠다 한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지금은 내가 웃으면 그곳에 메피스토펠레스처럼 불길한 웃음이 있을 뿐이다. 거울을 보며 노여움에 휩싸인다. 네놈은 대체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가. 이것이 현시점에서 네놈의 총결산인가.
아직 젊지 않느냐고 사람들은 말하리라. 인간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그런 터무니없는 일이 있을 리 없다. 젊은이에게 너무 오냐 오냐 하면 아니 된다. -9쪽
이 발언의 진실 여부를 검증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문체에서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바로 말하자면 귀군은 퍽 성찰적인 인간으로 보인다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본인이 그런 인간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착실한 사람을 좋아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귀군의 첫인상은 제법 괜찮습니다. 성실한 자아비판과 어떤 종류의 결기마저 느껴지는 실로 비장한 반성이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몇 페이지 가지 않아 그 감상은 다소 회의적으로 바뀌고 맙니다.
야채를 싫어하고 즉석식품만 먹기 때문에 안색이 어쩐지 달의 이면에서 온 사람 같아 심히 소름 끼친다. 밤길에 마주치면 열 중 여덟이 요괴로 착각한다. 나머지 둘은 요괴다. 약자에게 채찍을 휘두르고, 강자에게 알랑거리고, 제멋대로고, 오만하고, 태만하고, 청개구리 같고, 공부도 하지 않고, 자존심은 터럭만큼도 없고, 타인의 불행을 반찬으로 밥을 세 공기 먹을 수 있다. 칭찬할 점이 도무지 한 가지도 없다.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의 영혼은 더욱 맑았으리라. -13쪽
귀군이 스스로 말한 바처럼 '무도막심한' 학창생활을 보낸 것에 대해 눈물을 한 바가지를 흘렸건 어쨌건, 그것을 타기唾棄해야 마땅한 벗 오즈의 탓으로 돌리는 것도 모자라 그를 이렇게 묘사하다니요. 귀군은 치졸하기 짝이 없군요. 한데 그 치졸함이 너무나 낯익어서 실로 소름이 돋을 정도입니다. 에잇.
오즈가 그토록 무도한 벗이었을 수는 있겠으나 진정한 친구라면 그런 막되어먹은 생활로부터 그를 건져낼 방도를 강구함이 옳지 않았겠습니까. 당연히 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입바른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입니다만, 어쨌건 오즈와 귀군이 벌이고 다닌 온갖 가증스러운 짓거리들을 -그리고 귀군은 그것을 마치 무용담처럼 술회하고 있지 않습니까!- 보고 있노라면 기가 찰 따름입니다. 솔직히 여러 번 웃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하겠습니다만 그건 그거고.
기분 전환을 위해 면학에 힘쓰려 했다. 그러나 교과서를 보다 보니, 무익하게 지나간 2년을 만회하겠다고 꼴사납게 아등바등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좀스러운 모습이 나의 미학에 반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부득이 공부를 중단했다. -28쪽
그렇건만 나는 어느새 마음의 여유를 잃고, 올 나간 붉은 실이 띵 끊어지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유열을 느끼는 극악인으로 전락했다. -12쪽
이런 지경이니, 귀군이 늘상 입에 매달고 사는 '타기할 벗 오즈'에게 이런 넋두리나 하게 되는 겁니다.
"네놈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좀 더 유의미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 분명해. 학업에 힘쓰고, 검은머리 아가씨와 사귀고, 얼룩 한 점 없는 학창생활을 마음껏 만끽했을 것이다. 그렇고말고."
"왜 그래요? 아직 술 덜 깼습니까?" -260쪽
이런 방식으로는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습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해도 큰 틀에서는 비슷하게 변주되는 이야기는 마지막 편에 이르러 극적인 대반전을 맞이하게 되죠. 귀군도 마침내 알아차렸던 것 같지만, 그건 오로지 귀군이 마음을 달리 먹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가 달라지지 않으면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그때 내가 이것이 아닌 저것을 선택했으면 나의 인생길은 크게 달라졌을 거라고 지겹지도 않은지 같은 후회를 거듭하는 사람들이 세상엔 여전히 많고도 많습니다. 하지만 군도 겪었지 않습니까.
결국 모든 변화는 나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겁니다. 다다미 넉 장 반의 세상에서 탈출한 귀군이 오즈에게 다소곳이 우정을 고백했다가 더럽다고 차이는 장면은 또 어찌나 굉장한 카타르시스인지. 뭐 어떻습니까, 이제 귀군에게는 검은머리 여자친구 아카시 군도 있지 않습니까. 이러나저러나, 온갖 과오로 점철된 본인의 과거를 직시할 용기를 갖기까지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그래도 용케 그 자리까지 찾아온 귀군은 과연 성실한 사람입니다. 귀군의 멋진 미래를 응원하겠습니다.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