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브래머, 클로버의 후회 수집
한 번쯤 당신의 부모님이 어떤 의도로 지어준 이름일까를 곱씹어보게 하는 이름의 소유자, 클로버에게.
우선 이걸 먼저 묻고 싶네요. 지금은, 행복한가요? 그러길 바라요. 하지만 그게 온전히 당신이 찾았다고 생각한 사랑 때문만은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아주 약간 있다고 하면 혹시 속상해하려나요. 오랫동안 닫아걸었던 마음의 칩거를 끝내고 세상에 섞여 들기로 마음먹은 당신의 용기가 보답받은 것에서 더 큰 행복을 느끼기를 바라는데, 욕심일까요.
아무튼요.
최근에 죽음과 소멸에 관해 좀 진지하게 생각할 일이 있었어요. 주변에서 간혹 들려오는 누군가의 죽음이 더 이상 낯설거나 황망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는 게 조금 슬프긴 한데,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의 종말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게 보통 사람이잖아요? 세상의 모든 비극과 아픔, 고통이 나만큼은 비껴 지나갈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 그걸 부르는 용어도 있었던 것 같은데... 여하간 말이에요.
한 달 전쯤엔가, 느닷없는 사고(라고 해야 할지 대체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에 가까운, 당혹스러운 일을 겪었어요. 일종의 기억 상실이라고 해야 할까요. 밤마다 혼자 산책을 나가는 습관이 있는데, 그날도 그랬습니다. 그냥 평소와 똑같이 나갔다가 집에 잘 돌아왔어요. 엘리베이터가 1층에 있으면 괜히 기분이 좋잖아요. 1층에 얌전히 대기 중이던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고 럭키, 하고 혼잣말을 했던 건 분명히 기억에 있었어요.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릅니다. 갑자기 귓가에서 엄마가 뭐라 뭐라 말하는 소리가 들리고 순식간에 눈앞에 불이 켜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수술 경험이 있어서 전신마취에서 깨어나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아는데, 그때와 굉장히 흡사한 기분이었지요. 얼굴에는 아이의 핸드폰이 닿아 있었고 귓가에서 울리던 엄마의 목소리는 거기서 흘러나오고 있더라고요. 옆에, 앞에 손을 꼭 붙잡고 앉아 있던 아이들의 얼굴은 새하얗기도 하고 차분하기도 했습니다. 전후사정을 알고 보니 멀쩡히 문을 열고 들어와 씻고, 옷도 갈아입고 습관처럼 할 일을 하던 제가 갑자기 굉장히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내가 지금 뭐 하고 있었지,부터 시작해서 정신없이 뭐라고 지껄이더니 기어코 울더랍니다. 위기 상황이 닥치면 유난히 침착해지는 큰아이가 차분하게 저를 끌어다 앉히고 상황을 통제했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아이들이 제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걸고 그러던 와중에 정신도 기억도 조금씩 돌아왔죠.
그런 일이 있고 나니까 정말로 인간이란 뭘까, 육신의 기능 정지가 곧 죽음일까 하는 질문이 예전과는 달리 굉장히 서늘하게 와닿더라고요. 혹은 한 개인을 그 사람답게 만들어 주던 개성과 기억, 그런 것들의 소멸이야말로 진짜 죽음인 것은 아닐까 하고요. 나를 나답게 하던 모든 것이 일시에 소멸하는데 혹은 소멸로 향해 가는데 껍데기만 남은 그걸 계속 나라고 부를 수는 있는 건가, 하는 질문들이. 더불어 정말로 죽음이 코앞에 닥친다면 그때 남기고 싶은 말은 도대체 무엇일까 하고. 그보다는 애초에 내가 세상에 뭔가를 남기고 싶어 하는 사람인지, 아무런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인지조차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그래서 당신을 만나보기로 했어요. 뭐... 책이란 건 한꺼번에 줄줄 사들이고 일단은 쌓아두고, 그러다 마음 내키는 걸 뽑아서 읽는 거 맞잖... 아요? 맞죠?
임종 도우미라는 직업은 말만 들어도 어깨가 아픈 기분이에요. 너무 무거워서요. 한편으로는 당신이 어떻게 해서 그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보람을 느끼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니 섣부른 말을 얹을 수가 없는 기분이 들기도 하네요. 하지만 그게 어떤 일이건 간에 진지하고 경건하기까지 한 태도로 일에 임하는 사람을 보면 존경심이 이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요.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몸이 활동을 멈추는 신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한 채 끝나가는 자신의 삶을 지켜봐야 하는 감정적인 고통도 포함해서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보일 기회를 갖는 것은 그 어떤 말보다 더 큰 치유력을 지닌다. 그들이 슬픔에 압도되었을 때조차 눈을 들여다보며 상처에 공감해 주고 날것 그대로의 상처를 내보일 수 있게 돕는 것은 내게는 더없이 영예로운 일로 느껴졌다. 심지어 그들을 향한 내 마음이 찢기듯 아플 때도 마찬가지였다. -14쪽
요즘처럼 각자의 삶이 파편화되어 곳곳에 고통이 스며들어 있는 탓에, 나 아닌 타인의 고통과 슬픔까지 돌아보기 힘겨워하는 시기에 당신 같은 이들의 존재는 기적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당신 역시 고독한 사람이어서 외로움을 겪는 혼자인 타인을 유독 보아 넘기기 힘들었던 걸까요. 죽음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혼자가 되고 외로워지죠. 죽음만큼은 누구도 함께 동행해 줄 수 없이 홀로만 가야 하는 길이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홀로라는 것이 인간을 얼마나 외롭게 만드는지를 너무 어린 나이에 깨달아버린 탓에 적어도 당신이 같이 가 줄 수 있는 지점까지는 기꺼이 동행하는 쪽을 선택한 용감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내가 이 도시에 외로운 사람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아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내가 그들 중 하나라서다. -19쪽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언젠가 반드시 그들을 잃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거부나 배신이 아니라면 가장 확실한 원인은 죽음이다. 하지만 당신이 혼자라면 최소한 상처를 입을 위험은 없다.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잃을 순 없으니까. -80쪽
세상과 관계를 맺지 않고 관찰만 한다는 건 감정 투자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내가 아무하고도 가까워진 적이 없다면 아무도 나를 떠날 수 없다. (...)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삶의 껍데기 속에서만 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후회했다. -341쪽
그 마음을 이해합니다. 그 감정과 관련된 최초의 강렬한 경험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이별이어서, 아예 그 마음을 닫아놓고 싶어 하는 기분을 이해해요. 하지만 클로버, 내가 뭔가를 겪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 일이 나를 찾아오지 않는 요행 같은 건 없더라고요. 인생은 그렇게나 무자비하고 심술궂어요. 그래도 안심해도 좋은 것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이 그토록 심술을 부리면서도 내가 견딜 수 있도록 안정제는 주더라고요. 정말이에요. 물론 삼키기만 하면 되도록 그걸 내 입안에 쏘옥 넣어주진 않아요. 애써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하고 그걸 손에 넣기 위해 용기를 내야만 해요.
죽어가는 이들로부터 당신이 얻은 교훈을 정리해 두었던 그 파일 말예요. 그걸 보면서 나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어쩌면 사람은 이토록 비슷한 이유로 후회를 거듭할까를 궁금해했죠. 그러다 나름으로 결론 내린 건요, 어떻게 살아도 대부분의 인간은 죽음이라는 관문 앞에서는 후회를 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냥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요. 별반 새로울 것도 없는 깨달음 앞에서 리오 할아버지의 유언이 남달리 뭉클하게 읽히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겠죠.
아름답게 죽는 방법은 결국 아름답게 사는 것뿐이야. -427쪽
'잘' 죽기 위해서, 오늘 하루도 '잘' 살아봐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요, 클로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