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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Nov 06. 2024

어떤 삶이라도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루스 오제키, 우주를 듣는 소년

안녕, 애너벨. 혹은 당신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름으로, 미즈 애너벨 오.


왜 인생은 꼭 한꺼번에 여러 가지 문제를 떠안기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일까요. 수많은 픽션에서도 그렇거니와 현실의 인생도 다를 것이 없지요. 마치 네 역량이 얼마나 되는지 보여달라는 것처럼, 골칫거리들은 나란히 손을 잡고 줄지어 나를 찾아옵니다.


남편을 잃은 아픔을 채 극복하지도 못했는데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아들 베니를 감당해야 했던 당신처럼요. 참, 실직 문제도 있었죠. 게다가 퇴거 명령을 들먹이며 위협하는 집주인의 아들도 있었고. 당신의 삶도 정말이지 여러 차원에서 신산하네요.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긴 해요. 삶이 매끄럽게 잘 흘러갈 때와 달리, 어딘가에서 의도한 적 없는 매듭이 생기기 시작하면 곳곳에서 엉키는 건 한순간이라고. 그러니까 뭔가 나쁜 일이 생기기 시작하면, 대체 왜 나쁜 일은 나만 골라 찾아오는 걸까 싶을 정도로 괴로운 일들이 연달아 발생하는 건 어쩌면 자연의 법칙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애너벨은 자신의 행운에 놀라워했지만, 켄지는 다르게 설명했다. 그것은 '운', 다시 말해 그들의 운명이라고, 어쩌면 전생에서부터 이어진 신비한 인연이 현생에서 그들을 묶어준 거라고 그는 말했다.

켄지의 말이 맞았을까? 어떻게 이 세상에서, 80억 명이 살고 있는 이 광대한 행성에서, 서로에게 운명 지어진 두 명의 작은 인간들이 만나게 되는 것일까? 냉소적인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다고, 운명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만나고 사랑에 빠지지만, 그런 만남들은 무작위적인 우연일 뿐이며, 운명이란 그저 나중에 만들어 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이다. -55쪽



 사랑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냉엄한 현실은 뭐가 어쨌건 바로 곁에서 일상을 함께 하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당신처럼 운명적인 사랑을 믿었던 사람이건,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건 함께 삶을 나누던 사람이 느닷없이 죽음으로 떠나 버렸다는 것을 실제로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조차 '대강은' 미루어 짐작합니다. 일종의 학습된 감정이라고 해야 할까요,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게 얼마큼 한 사람의 일상과 내면을 조각낼 수 있는지 대강 뭉뚱그려 짐작은 한다는 의미였어요. 물론 슬픔이란 지극히 개별적이어서 제가끔의 질량과 부피로서 한 사람의 삶을 지배하기 마련이지만요.


 당연하게도, 베니 역시 아빠의 죽음 이후에 안전하게만 느꼈던 세계가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죠. 그래서일까요? 베니는 켄지가 죽은 뒤로 어느 날부터인가 그를 둘러싼 사물들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 목소리들은 내 뇌의 주름 속에 심어져 있다가 어찌어찌해서 발동되는 무작위적인 악성 코드 같아. 어쩌면 누구의 뇌에나 그런 것들이 있는데, 내가 너무 민감해서 듣기 시작한 건지도 모르지, 안 그래? 상담선생님은 슬픔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 수 있다고 해.

목소리들이 곧바로 들리기 시작한 건 아냐. 아빠가 죽고 1년쯤 지났을 때까지는 그냥 아빠 목소리 뿐이었어. 그냥 밤에 침대에 누워 씻을 때 화장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를 부르는 정도였어. 잠들었을 때 나를 부르는 아빠의 목소리를 듣곤 했지. 그런데 알아? 그럴 때면 마치 아빠가 거기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 -63쪽



베니는 베니 나름으로 너무나 절박한 상황에 빠졌고, 갑자기 휘몰아치듯 닥친 신체적 변화에도 대응하지 못해 어쩔 줄을 모르는데 애너벨, 당신에게 연달아 닥친 절망적인 일들로 인해 당신도, 베니도 서로에게 위안이 되어주지 못하게 되는 순간에 이르러 가슴이 아팠습니다. 필연적으로 베니는 방황하며 힘겨운 시기를 보내게 되고, 당신은 속수무책으로 아이의 마음이 멀어지는 때를 견뎌내야만 했으니까요. 이건 지금도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그저 이야기가 이야기로만 여겨지진 않았던 거예요. 책에서 벗어난 곳에 있을 또 다른 애너벨과 베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죠.


당신들을 그려낸 루스 오제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대를 무척 소중하게 생각하는 작가입니다. 누군가가 잘못되지 않기를 바라는 아주 연약한 관심일지언정, 그런 것들이 존재하는 이상 우리는 잘 살아남을 수 있다고, 누군가에게는 분명히 도움이 된다고 믿는 사람이죠. 꾸준히 그런 이야기를 쓰는 작가입니다. 이번에는 책들이 우리에게 그런 일들을 해줄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이 비록 어떤 사람들은 '그저 그런 실용서'라고 부르는 책일지라도요.


그 작은 책은 그녀의 배 위에서 호흡에 따른 부드러운 오르내림과 베개처럼 폭신한 촉감을 즐기며, 밤새 그녀를 지켰다. 그 후 애너벨이 다시 <정리의 마법>을 읽기까지는 한참이 걸렸지만, 책은 인내심이 많다. 우리는 당신들의 삶이 얼마나 긴박하고 절박했는지 알고, 그래서 가만히 때를 기다린다. -132쪽


그런데 이 아름다운 책의 번역본 제목에는 조금 불만이 있습니다. 원제는 The Book of Form and Emptiness라고 하죠.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나름이겠습니다만 저는 이 원제는 바로 당신의 아들,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이기도 한 베니를 의미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인간이라는 꼴을 갖추었으나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 내려 갈 시기에 이르지 못한 탓에 아직 페이지가 비어 있는 한 권의 책처럼요. 이 이야기가 베니 그 자체라고 생각했거든요.


원래 이야기는 결코 처음부터 시작되지 않아, 베니. 이야기는 그런 면에서 삶과 다르지. 삶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는 거야. 처음부터 알 수 없는 미래까지 말이야. 하지만 이야기는 나중에 말하는 거야. 말하자면 이야기는 거꾸로 사는 삶이지. -45쪽


라고 어떤 책이 말했듯이 말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호명한 이유는요. 그 막막한 슬픔을 흐릿하게나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묵묵히 통과하는 것 말고는 딱히 다른 대안이 없는 삶은 그때만큼은 고통스럽고 힘겨울지라도 적어도 멋진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하나 더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을 베니의 이야기로 읽는 사람도 많겠지만 나처럼 애너벨의 이야기로 읽는 사람도 적잖을 거라는 거예요. 작가가 말했듯,


모든 독자는 고유하기 때문에, 지면에 뭐라고 쓰여 있건 당신들은 각자 우리가 다른 의미를 갖도록 만든다. 그래서 똑같은 책도 서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읽힐 때 전혀 다른 책이 되고, 파도처럼 인간의 의식을 관통해 흐르는, 끊임없이 변하는 책들의 집합체가 된다. 'Pro captu lectoris habent usa fata libelli.' 읽는 사람의 역량에 따라 모든 책은 저마다의 운명이 있다. -618쪽


그런 것이니까요!

슬픔을 청산하려고 너무 애쓰지 말아요. 그 틈에서도 웃는 날들을 찾는 게 불가능하진 않으니까요. 당신은 열심히 버텨냈고, 잘 이겨내고 있어요. 내일도 힘내서 잘 살아봐요, 애너벨. 내일의 하루도 봄볕 같은 볕뉘가 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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