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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Dec 04. 2024

어~이, 마유미 짱!

오쿠다 히데오, 공중그네

처음 이 편지글의 초안을 잡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비타민 주사를 놔드리고 싶었으나, 지금은 비타민 주사를 맞으러 찾아가고 싶은 이라부 이치로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이라부 종합병원의 신경정신과 전문의 이라부 선생님. 저는 사는 게 우울하고 힘든 순간이면 항상 이라부 선생님을 생각하는 사람이랍니다. 사실 내담환자와 함께 하는 선생님의 일상모험담이 비타민이자 도파민 그 자체이기는 하죠. 


어젯밤 편지글의 첫머리를 써 내려가다가 저는 믿기지 않는 소식을 접했고, 그 충격을 다스리느라 밤을 하얗게 밝힌 것은 물론 오늘의 일정조차 완전히 잊고 말았습니다. 당연하잖아요. 느린 구간은 느리게, 빠른 구간은 빠르게. 매일같이 올라타고 있는 일상열차가 갑자기 탈선해 버렸고 나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그냥 공허의 무중력 속으로 내던져진 겁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믿기지 않는 단 하나의 정보만이 반복재생되고 있는데 그나마 살아 움직이는 한 조각의 이성은 그 정보를 수용하기를 극렬하게 거부하는 상태였고. 아마 그건 저뿐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동시에 겪었던 전대미문의 쇼크였을 거예요. 더더욱 안타까운 건 이런 '전국민 멘탈붕괴'의 사건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고.


세상천지에 해결하지 못하는 마음의 병이 없어 보이는 이라부 선생님. 

말씀 좀 해주세요. 이런 상황에서 정신을 추스리기 힘든 사람에게는 어떤 처방을 내려주실 건가요.


한 번도 만난 적도 없는 선생님이 계신 지하 진료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예의 그 들뜬 목소리로 "우선 주사부터 맞을까" 하고 반겨 맞을 것 같긴 합니다. 원래는 <그나저나 선생님은 도대체 왜 환자에게 냅다 비타민 주사부터 맞게 하는 건가요. 그게 선생님의 크나큰 기쁨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것 같지만, 왜 그런 희한한 취미를 키우셨는지는 정말이지 이해를 못 하겠어요...


그것도 선생님과 환상(장)의 콤비를 이루는 마유미 간호사가 없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을 일 아니겠어요? 나와 쿵짝이 잘 맞는 업무 파트너가 있다는 게 얼마나 삶의 큰 활력소가 되는지 선생님과 마유미 간호사 콤비를 보고 있노라면 뼈저리게 깨닫곤 합니다.> 라고 쓰려고 했어요. 이렇게 써 두었었네요. 

하지만 지금은 정말이지 어~이, 마유미짱~! 하고 간호사를 불러 당장 주삿바늘을 꽂게 하는 선생님을 실물로 만나고 싶은 욕구가 치솟네요. 1인당 1 이라부 선생님을 처방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입니다.


몹시 뚱뚱한 중년 의사가 만면에 미소를 띠고, 1인용 소파에 떡하니 버티고 앉아 있었다. 살갗이 흰 바다표범 같은 용모였다. 가운 명찰에는 '의학 박사ㆍ이라부 이치로'라고 씌어 있었다. 원장 아들쯤 되나? -15쪽


바다표범처럼 생긴 너그럽고 푸근한 선생님의 외모라면 확실히 퍽 위로가 될 것 같거든요.

물론 전 선생님의 행동 전부에 찬성하진 않아요. 뻔뻔스럽게 굴어서 주위 사람들이 그 뻔뻔함에 익숙하게 만든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진다니까요. 그런 건 좀 고치시는 게 어떨지. 그래도 주사 좋아하는 것까지는 뭐라고 하지 않을게요. 그건 뭐랄까... 그냥 선생님의 페르소나 그 자체 같단 말이죠.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바로 코앞에 잔뜩 흥분한 이라부의 얼굴이 보였다. 벌겋게 달아오른 뺨에 반짝이는 눈빛으로, 주사 놓는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이 새끼. 혹시 변태 아냐~. -27쪽
"중요한 건 훈련입니다. 지상 5센티미터 높이에서 건너는 평균대를 지상 10미터에서도 건널 수 있느냐, 그게 일반 사람과 서커스 단원의 차이니까 넘어서야 할 건 기술이라기보다 오히려 공포감이라고 해야겠죠."-79쪽


넘어서야 할 건 공포감. 지금 제게 필요한 건 그 말인 것 같습니다. 사실 지금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술렁술렁해서 불안하고 괴로운 건 마찬가지예요. 이건 아무래도 과거의 그 비극이 현재진행중이었던 시절, 위험천만한 시위가 지나간 현장을 밟고 학교를 다녔던 꼬마의 몸에 남은 기억 탓인 것 같아요.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도 언제든 되살아나 마음을 태울 준비를 하고 있는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에게, 선생님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은 어쩐지 통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럼에도 선생님처럼 유쾌한 의사가 많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밤입니다. 네, 밤이 왔어요. 오늘은 무탈한 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은 오늘은 또 어떤 모험을 하고 오셨으려나요. 다음에 또 다른 책에서 들려주세요. 즐겁게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안녕히. 


http://aladin.kr/p/mFH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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