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친애하는 바질 홀워드 씨.
당신에게 붙일 수 있는 적절한 인사말이 대체 뭐가 있을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신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제 말은 당신이 한때 살아서 예술혼을 불태웠던 그 시대, 그 장소에서조차 말이에요. 이 이야기를 썼던 오스카 와일드는 당신에게 그 스스로를 많이도 투영했던 모양이에요.
당신은 평생의 뮤즈라고 할 만한 모델을 만나 그의 초상화를 그리던 중이었죠. 그 모델이 바로 도리언 그레이고요. 도리언은 그야말로 누구나 탐낼 만한 청신한 아름다움을 가진 미청년이죠.
그런 모델을 화폭에 담아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만도 기쁠 텐데 당신은 예술적 감식안이 뛰어난 워튼 경으로부터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대단한 역작을 만들어냅니다.
당신의 친구이자 이 소설에서 소극적 악역을 맡은 헨리 워튼 경은 당신에게 도리언의 초상화를 그로스브너(Grosvener Gallery)에 출품해야 한다고 강경하게 권유하죠. 그로스브너(그로브너) 화랑은 아카데미의 회원이 아니어도 작품을 전시할 수 있게 한, 귀족적 문화 체험 공간이었다고 하네요(잘 몰라서 찾아봤어요). 하지만 당신은 그림 속에 당신 자신을 너무 많이 '집어넣었다'는 이유로 출품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건 말도 되지 않는 유치한 이유라고 일갈하는 헨리에게 당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감정을 품고 그린 모든 초상화는 말이야, 그 대상의 초상이라기보다 화가 자신의 초상이라네. 대상은 단순히 우발적으로 그곳에 놓인 대상일 뿐이지. (...) 내가 그 그림을 출품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내 영혼의 비밀이 그 속에서 드러나는 것을 바라지 않아서라네." -49쪽
저는 여기서 고개를 마구 끄덕일 수밖에 없었어요. 내밀한 자의식이 속속들이 드러난 창작물이 뭔지 너무 알겠거든요. 물론 대부분의 창작물이란 창작자를 비춰내게 마련이겠지만 그중에서도 유난히 그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있으니까요. 당신에겐 도리언의 초상화가 그런 것이었겠죠.
바질, 당신에게 영감의 원천이자 끝없는 창작욕을 불어넣어 주는 도리언의 존재가 얼마나 귀했을지 이해하기 때문에 헨리에게 도리언을 망치지 말아 달라고, 그에게 나쁜 영향을 주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데에서 헨리 워튼 경이 어떤 종류의 악덕을 가진 사람인지가 여실하게 드러납니다.
하지만 헨리는 당신의 애원에도 아랑곳없이 도리언에게 찬사를 퍼부으며 그를 찬양함으로써 아직 여물지 못한 품성의 그를 타락의 구덩이 입구에 세워버립니다. 이런 말로요.
"그레이 씨, 장밋빛의 붉은 청춘과 장미처럼 새하얀 소년 시절을 거쳤을 당신 역시 자신을 두렵게 하는 열정을 품었을 테고, 자신을 공포로 가득 채우는 생각들을 했을 것이며, 단지 떠올리는 것만으로 당신의 뺨을 수치로 물들이게 했을지도 모를 밤과 낮의 꿈들이 있었을 거요." -68쪽
이와 같이 그에게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난 세상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충만하고 온전하게 살려고 한다면, 자신의 모든 감정에 형태를 부여하고, 모든 생각을 표현하고, 모든 꿈 꾸는 것을 실현해야 한다고 믿어요. 세상이 중세 시대 동안 잊었던 기쁨의 신선한 충동을 되찾아야 한다는 거죠." -67쪽
이런 말들을 번갈아 듣다 보면 취약한 정신은 쉽게 흔들리지 않을 수 없겠죠. 아마도 당신은 헨리가 도리언을 크게 망칠 수도 있으리라는 어떤 직감을 느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도리언은 이와 같은 말에 속절없이 흔들립니다.
그는 바질 홀워드를 수개월째 알아왔지만, 그들 사이의 우정은 그를 전혀 변화시키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느닷없이 마치 삶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것 같은 누군가가 그의 삶에 끼어들었다. 그런데도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는 어린 학생도 소녀도 아니었다.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황당했다. -72쪽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도리언은 헨리에게 묘하게 설득당하고 매혹되는 자신을 느낍니다. 그가 늘어놓는 찬사에 이성이 녹아가죠. 헨리가 말하는 대로 이전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언젠가 틀림없이 상실하게 될 현재의 아름다움에 지독하게 집착하는 마음이 싹을 틔우기 시작하고요. 그리하여 도리언은 시시각각 그가 잃어가는 청춘과 아름다움을 간직하는 초상화를 무섭게 질투하기 시작하고 종래는 자신이 그와 같기를, 당신이 그려낸 초상화가 그의 노화와, 그가 욕망이 좇는 대로 살아가는 대신 얻게 될 죄과를 감당하게 되기를 바라지요.
그저 순수하기만 했던 예술적 욕망이 누군가에게는 악덕으로 가는 계단이 되어버리는 아이러니를 쭉 지켜보는 마음은 결코 가볍고 흥미진진할 수만은 없습니다. 아마 그것이 문학의 미덕이겠지요. 결코 겪을 일 없으나 호되게 겪은 것처럼 마음에 어떤 고뇌를 졌던 흔적을 남기는 일 말이에요.
당신이 없었더라면 만날 일이 없었던 두 사람이 악연 -본인들은 부정할지라도- 을 맺어준 사람으로서 당신이 지고 있었을 마음의 짐 역시 외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 테고요. 심지어 그들은 이제 당신을 두고 속물적이고 재미없는 사람 취급까지 한단 말이에요. 이건 온당치 못합니다. 그런 일들이 줄기차게 일어나는 곳이 현실이고요. 씁쓸하네요.
변해버린 도리언을 힘겹게 찾아간 당신이 초상화를 그릴 당시의 소박하고 천진한 그를 그리워하자 도리언은 냉랭하게 말합니다. 당신보다 헨리에게 더 많이 신세를 졌으며, 당신이 그에게 가르쳐 준 건 허영밖에 없다고요. 당신이 그렸던 도리언 그레이를 찾지 말고, 지금의 도리언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요. 똑같은 일이 제게 벌어진다면, 과연 어떻게 대답할까요. 어떻게 반응하는 게 옳은 일일까요.
완전히 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죠. 저는 부정하고 거부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어쩌면 그 친구는 제게 한 번쯤 변명하고 싶었을지도 모르지만 듣고 싶지 않았어요. 지금 와서 같은 일을 겪는대도 저는 다르게 행동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바질, 당신은 계속 도리언을 되돌려 놓고 싶어 하더군요. 그건 인간적이고 순박했던 그의 옛 모습이 그리워서인가요, 수많은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던 뮤즈가 필요해서인가요?
물론 전자라고 믿고 싶어요. 그런데 저야말로 지나치게 속물적인 인간이 되어버려서인지 후자의 가능성을 아예 배제하진 못하겠더라고요. 당신은 자신이 숭배했던 모습을 잃었다고 도리언을 강하게 비난했죠. 물론 부도덕하게 타락해 간 도리언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추앙하던 모습을 지켜야 할 당위가, 혹은 윤리가 개인에게 존재하나요?
당신과 격하게 다투었던 도리언이 그렇게 말했죠. 인간은 누구나 내면에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그 말만큼은 동의합니다. 도덕의 보편성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이지만, 그것이 타인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는 아니지 않은가요. 덕분에 오랜만에 머리가 아주 복잡합니다, 바질. 참, 생각나서 덧붙이는데 풀 수 없으리만치 어렵고 괴로운 문제 앞에서 죽음을 택하는 것만큼 쉽고 비겁한 선택은 없다고 힘주어 말하고 싶어요. 물론 당신의 죽음이 스스로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요.
그러니 계속 생각하세요. 당신의 문제는 무엇이었고 그것이 도리언의 어떤 부분을 죽였던 것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