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athan Auxier, The Sweep
안녕, 싹싹하고 명랑한 19세기의 굴뚝 청소부 꼬마 낸Nan 그리고 숯검댕 Char에서 태어난 골렘 친구 찰리 Charlie. 그때와 같은 굴뚝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의 거주 공간에서 새해 인사를 보내요. 지금은 춥지 않은가요?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연달아 맞는 수요일, 과연 누구와 이야기하는 게 제일 어울릴까 고민했어요. 크리스마스 하면 제일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건 찰스 디킨스가 세상에 살아갈 자리를 만들어 주었던 이름들인데, 그건 어쩐지 누구나 다 생각할 법한 이름이라 다른 사람은 없을까 제법 오래 고민했답니다. 그러다 생각난 것이 찰리와 낸이었어요. 두 사람(?)은 디킨스의 세계에서 왔다고 해도 별 의심 없이 믿을 것만 같을 정도로 그 세계의 거주자들과 퍽 닮아 있다는 사실을 지금 막 깨달았어요. 정말로 많이.
흔히들 빅토리아 시대라 말하는 시기는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한 뒤부터 서거할 때까지의 60년이 조금 넘는 기간을 가리키는 말이죠. 이 시대 이전에도 아동의 노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산업 발전의 여파로 인한 극도로 위험한 환경에서 어린아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던 부끄러운 시기이기도 했고요.
「The Sweep」은 바로 그 시기, 굴뚝 청소라는 위험천만한 노동에 투입되었던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죠. 어른들조차 감당하기 쉽지 않은 상실과 상처를 감당하며 살아야 했던 어린이 노동자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의지처가 되어주는 순간들을 만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어요.
굴뚝 청소를 하다 무슨 사고가 일어날지 몰라 잔뜩 겁먹은 어린 뉴트를 달래주며 낸이 들려준 이야기는 현실 부정도, 두려움의 축소도 아니었죠. 대신 뉴트가 들었던 것은 그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에 관한 것이었죠.
"굴뚝을 기어 올라가는 게 별일 아니라거나 겁먹을 필요 없다는 말 같은 건 안 해. 그치만 무서워서 벌벌 떠는 게 이 일의 전부는 아니야. 우리가 올라가는 덴 다른 이유도 있어. 그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올라갈 만한 가치가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거지. 지붕 꼭대기에서 보는 도시의 풍경 있지, 그건 진짜 끝내주거든." -27쪽
미안해요, 낸. 아무리 기억하려고 해 봐도 낸이 몇 살이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거 있죠. 책에서 찾아보려고도 해 봤는데 잘 찾아지지 않더라고요. 대강 열 살 언저리였다는 것만 기억나요. 근데 솔직히 여덟아홉 살이건, 열 살이건 아이가 할 일이 아닌 일에 붙들려 있다는 상황이 달라지진 않잖아요. 낸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지만, 실제 당시의 영국엔 낸과 같은 아이들이 더 많았을 거라는 사실이 안타까워요.
어떤 아이들은 그런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어린 목숨을 잃기도 했을 테죠. 그 아이들이 낸처럼 골렘 보호자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잖아요. 그 생각을 하면 목이 따끔거리기도 하고요.
굴뚝에 끼었다가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 날, 문득 주머니에 소중하게 넣어 다녔던 숯이 껌벅거리는 눈동자를 달고 자아를 가진 생명체로 태어난 것을 발견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를 생각해 봤어요. 지독하게 외롭고 아픈 순간 선물처럼 찾아온 존재였잖아요. 어릴 적 낸을 돌봐주고 지켜줬던 굴뚝 청소부 아저씨가 다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은 아니었을까요.
눈만 껌뻑이던 숯은 char원래의 명칭을 닮은 찰리라는 이름을 얻은 뒤로 점차 인간을 닮은 형체를 갖추고 자아를 갖추고... 언어를 터득한 골렘이 되어 낸의 곁을 지켰죠. 간혹 이런 질문으로 낸을 고심하게도 하지만요.
"있잖아, 낸. 괴물이 뭐야?"
"괴물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겁먹게 하는 뭔가를 가리키는 말이야. 음, 어떤 종류의 생명체 같은 것?"
"아, 그렇구나." 수긍했던 찰리가 되물었다. "내가 괴물이야?"
낸은 대답하기까지 몇 분간을 망설였다. 낸은 그녀가 이 도시에서 무사히 살아있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신경 쓰지 않았던 무심한 사람들과, 크루드와 트런들을 잠시 떠올렸다.
"난 전에도 괴물을 본 적 있어." 낸이 찰리의 머리에 제 머리를 기댔다. "넌 그들 중 누구와도 같지 않아."
-99쪽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질문들은 나의 가치관을 선명하게 다듬고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스스로 깨닫게끔 돕기도 한다고. 낸에게는 궁금한 것이 생기면 묻고 답을 듣는 것으로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나갔던 찰리의 존재가 낸의 세계를 또렷하게 만들어주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하고.
토비 역시 낸에게는 그런 친구이고 가족이었을 거예요.
"내 생각엔 아저씨가 나를 구하려고 그랬던 것 같아."
"너한테 짐더미를 안기는 걸로?"
"아냐, 바보야." 토비가 말했다. "나한테 살아야 할 목표를 주는 걸로. 그때부터 난 살아야 했다고. 무슨 나쁜 일이 일어나더라도 말야. 왜냐면 내가 죽기라도 하면, 그땐 대체 누가 낸 스패로우를 지켜본단 말야?"
토비가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희미한 달빛의 반짝임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맑은 밤하늘이었다.
"그런 거야, 그렇지? 우리는 다른 사람을 구할 때 스스로를 구원하는 셈이라고." -179쪽
아무런 힘도 없고 기댈 데조차 없는 아이들이 서로를 지키기 위해 제 몫의 생을 버티어 나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기도하는 심정이 되기도 하죠. 부디 이것이 픽션 속에서만 존재하는 이야기이기를, 혹은 과거에 존재했던 이야기이기를.
토비의 말이 정말 옳아요. 아무리 작고 사소한 거라도 매일같이 지켜야 할 작은 목표가 하나라도 있으면 우리는 어떻게든 생을 버틸 만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 같기도 해요. 그것이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보다 약하고 때로는 도움이 필요할 것 같은 존재를 위한 목표라면 더더욱 그렇겠죠. 어쩌면 집 창가에 놓아둔 작은 화분 한 개에 물을 주는 일이라도, 내가 없으면 바짝 말라버릴 작은 생명을 위해서 살 수도 있는 거죠. 언젠가 거기서 피어날 한 송이 꽃으로부터 내가 위로받을 수도 있는 것처럼.
"나 무서워. 내가 걔를 보호하지 못하면 어떡해?"
"그게 바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쓰고 있다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토비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웃음기도 없었다. "네가 두렵지 않다면,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은 거지." -270쪽
그러니까 낸, 낸 역시도 찰리를 염려한 나머지 찰리가 잘못될까 봐 무서워하는 마음을 갖기 시작한 거잖아요. 돌봐줘야 하는 어린 동생 같은 존재가 어느덧 다정한 친구이자 살가운 가족이 되었을 때 행복감과 동시에 반드시 함께 찾아오는 감정이 있죠. 두려움이라고 부르는 거요. 그것만큼은 참 공평하게 오더라고요. 누구도 빠트리지 않고.
막연한 두려움이 상실로 닥쳤을 때,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할 건 상실 안에서조차 우리는 뭔가를 발견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미 오래전 곁을 떠난 굴뚝 청소부 아저씨에게, 낸의 존재 자체가 그에게는 커다란 구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처럼요.
아마도 작가는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우리가 나보다 연약한 존재를 위해 마음을 쓰기 시작할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함께 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고. 그러니까 작고 약한 존재들에게 지금보다 조금 더 다정해지고, 조금 더 너그러워지자고. 아무리 가진 게 없고 당장 오늘 먹고 자는 일이 힘든 이조차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고.
새로운 해가 시작됐어요, 낸. 이 인사를 해도 될까요? HAPPY NEW YEAR!
ps. 본문 인용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인용문은 직접 번역했기 때문에, 다소 어색하게 읽힐 수 있습니다. 이해를...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