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라 캐더, 루시 게이하트
마음의 종신형을 선고받았던 해리,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먼저 이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처음에 이 소설을 두고 편지글을 쓰겠다 마음먹었을 때 최초의 수신인은 사실 루시였어요. 왜냐고 묻지도 않을 게 분명하죠, 당신이라는 사람은. 자존심에 상처를 받으면 가식으로 다친 마음을 꽁꽁 싸매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바보였잖아요. 다시 천천히 읽어본 「루시 게이하트」는, 루시의 이야기였지만 당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더라고요. 그리고 이 찬란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며 루시를 제외하고 가장 먼저 주목하게 되는 인물도, 가장 마지막 장을 닫는 인물도 다른 누구도 아닌 해리 고든이니까요.
작가가 묘사하는 루시는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에요. 루시가 거리를 걸어 다닐 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 멀리 어룽어룽한 초여름 나무 그늘 밑에서 빛나는 흰 형체만 보고도 특유의 움직임 덕에 누구인지 늘 알아보았다. (...) 분명 그 모든 것을, 입고 있는 여름옷과 공기와 햇볕과 활짝 피어나는 세상까지 만끽하고 있었다. -10쪽
이렇게 루시를 식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까요. 게다가 마을의 남자아이들이 루시 눈에 잘 보이려고 그토록 애쓰는 지경이었다고 하니, 당신이라고 뭐 별 수 있었겠어요. 이해해요. 다 그런 거죠 뭐. 사실 생에 애착이 있는 사람은 어디서든 빛이 나게 마련이어서 사람이라면 그런 반짝임에 흔히 홀리게 마련이니까요. 물론 간혹 동경을 지나친 시기심으로 그 사람을 괴롭히려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요.
어쨌든 꽤 부유하고, 교양도 넘치는 집안의 자제셨던 당신은 스스로의 격에 맞다 생각하는 부잣집 아가씨와 피아노와 음악을 사랑하는 루시를 배우자 후보에 놓고 잠깐이나마 고심한 것도 같았지만 결국 루시에게 더 끌리는 마음을 어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루시는 '지금 이곳에 속하지 않은 다른 생과 감정', '저 먼 곳의 아득한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는 행복'을 아는 사람이었고, 그런 이가 현재적 행복에 만족하는 이들과 다른 매력을 발산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일 거예요. 어렴풋이 그 사실을 감지했기 때문에, 당신은
해리는 새해 전야를 좀처럼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루시는 마냥 행복하고 천진한 시골 여자애가 아니었다. 무언가를 지향하는 여자였다. 그는 결심해야만 했다. -28쪽
이런 순간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죠. 아, 하지만 해리. 당신이 너무 안 됐어요. 안 됐다고 생각했어요. 상당히 바보 같은 청혼이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거야 뭐 능숙한 쪽이 오히려 이상한 거니까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하필 루시는 그때 반주를 도맡고 있었던 오페라 가수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겨 있는 상황이었단 말예요. 그것도 풋내기인 당신에 비해서 얼마나 어른스럽고 상대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어 있는 능숙한 어른이었는지. 불공평한 게임이었죠. 그렇지만 해리, 당신에게는 이런 무기가 있었단 말이에요. 당시의 본인은 모르고 있었겠지만.
동이 트기 전부터 잠에서 깬 루시가 그를 데리고 강으로 오리 사냥을 가던 아침이 떠오른 날도 있었다. 이슬이 촉촉한 들판 위의 무거운 침묵, 속살거리는 물소리, 금세 환해진 새벽의 동녘, 산들바람에 깨어나는 미루나무 꼭대기의 잎사기, 진줏빛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 그리고 그의 팔꿈치에 매달린, 그는 영영 알지 못할 초롱초롱한 열의와 행복. 사소한 것, 실로 아무것도 아닌 것에 그토록 행복해할 수 있다니! 그는 그런 성정이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런 축복을 누리지 못했다.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해도 외면했을 터였다.
하지만 잠시 루시를 통해 엿보는 것, 한순간 귀 옆으로 느껴보는 것은 좋았다. 가만히 서서 동이 트는 모습을 지켜보거나 새가 날아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그의 옆에서 느껴지는 기대감에 저릿저릿했다. -229쪽
이게 별거 아닌 거 같죠? 그런데 별거예요, 이 풋내기 신사야. 아주 별거였단 말이죠. 왜 말을 안하니... 왜 해야 될 말을 못하니...
어떤 분들은 루시와 루시가 사랑했던 바리톤 가수 서배스천의 사랑에 대해 가슴 아파했어요. 그것도 사랑이 아니지는 않았을 거예요. 사람은 다 자기 나름의 이유로 타인을 사랑하고 그를 통해서 뭔가를 새롭게 발견하니까요. 있잖아요, 해리. 사실 이건 비밀이었는데 당신에게만 말해줄게요.
나는 서배스천이 루시를 사랑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랑이란 건, 내가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던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이고 굳이 내가 가보고 싶었던 적 없던 곳이라도 발 디딜 용기를 내게 해 주는 것이거든요. 뭔가를 발견하게 되고 새롭게 알게 되는 것, 내게 사랑이라는 건 그런 거란 말이죠. 루시는 서배스천을 사랑한 게 맞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서배스천은 루시를 사랑한 게 아니지 않나 싶고.
이건 대체로 내가 나이 많은 쪽이 젊은 쪽을 사랑한다고 할 때 다소 회의적으로 (+비딱하게 그 관계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한데) 대개 그 경우엔, 젊은 파트너 쪽을 통해 자신의 젊었던 시절을 회상하거나, 그 젊음을 통해 뭔가를 재발견하는 일이 아주 잦아서 그래요. 그건 뭐랄까, 사랑이라기보다는 자기 위안이고... 기만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거죠.
물론 이것도 아주 편협한 생각일 수는 있어요. 하지만 적어도 이 이야기에서 서배스천이라는 가수가 그에게 충심에 가까운(이건 본인들 입으로 한 말이니 의심의 여지가 없죠!) 애정을 바친 루시에게 했던 말들을 미루어 보면 내 생각이 아주 틀리진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당신이 더 안타까워요. 그냥 딱 그 나이만큼 서툴렀던 것뿐인데. 진심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잘 몰랐을 뿐인데. 다친 자존심을 어떻게 다루어야 좋을지 몰랐던 것뿐인데, 당신 말마따나 종신형을 받은 셈이 되었네요.
그냥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해리.
질투심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얼토당토않은 상사병은 어디까지 간 거야"라고 묻는 대신, 루시가 해리에게 무엇을 일깨워줬는지를 말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해리가 몰랐던 세계를, 감정을 어떤 식으로 가르쳐줬는지를 말해줬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루시는, 조금 다른 결말을 맞을 수 있지도 않았을까 하고요.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름다운 소설이 탄생하게 된 거겠지만, 훌륭한 소설과 긴 여운을 위해 희생당한(...!) 해리 고든의 삶이 어땠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요.
그럼에도 성실하게 현실을 감당하며 남은 생을 살아나갔다는 점이 제일 좋았어요. 한때는 상실감에 시달렸을지언정 죄책감이 자신을 짓눌러오지 않게끔 스스로의 삶을 부지런히 일구며 살아나갔고 그런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며 살아갔다는 것이. 잘했어요, 해리.
고쳐쓸 수 없는 과거에 사로잡혀 미래마저 망쳐버리는 수많은 얼간이들을 보다 마침내 루시와의 과거를 아프지 않게 회상할 수 있게 된 당신을 보니 어찌나 속이 개운하던지. 당신의 삶을 응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