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코널리, 잃어버린 것들의 책
안녕, 아마도 거의 20년 가까이 되었을 나의 옛 친구. 어떤가요, 돌아간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과 잘 지내고 있나요? 부디 그러기를 바라요. 한때 아버지의 사랑을 배다른 동생과 나누어야 한다는 질투심과 일찍 세상을 떠났던 엄마를 그리워하는 마음 사이에서 종종 괴로워했던 데이빗. 세상에서 가장 미운 사람이었을 동생을 팔아넘기는 대가로 절실한 소망을 이루어주겠다는 유혹에 시달렸던 데이빗. 그래서 당신의 이름은 곧 나의 이름이 되고 그 시절을 아는 모든 사람의 이름이 되기도 합니다.
한 부모에게서 난 동생조차 미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는 것이 아이들이죠. 지금은 서로를 애틋하게 여기는, 내가 키워낸 자매들조차(라고 쓰고 잠시 1분간 정말 그러한가 가슴에 손을 얹고 숙고하는 시간을 가짐) 그들의 어릴 때를 돌이켜 보면 그건 매일매일이 전쟁이었습니다. 농담이 아니에요. 하루종일도 그 과거지사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몇 가지를 이야기해 볼까요.
두 살 많은 언니가 태어난 지 이년 남짓 지나 조금씩 미운짓을 하기 시작한 동생을 가리키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접어서 서랍에 넣어 버려." (빨래를 개켜 넣던 엄마를 유심히 관찰하다 한 말)
요거트를 야무지게 떠먹다 말고 동생이 엉금엉금 기어 오니 날래게 제 아빠 무릎으로 뛰어올라가서 털썩 주저앉더니 이렇게 말한 적도 있군요.
"아빠, **이가 부러워하니까 더 맛있다."
성격이 장난 아니었던 동생은 어느 날 하극상을 저지르기에 이르죠. 성질이 뻗친 나머지 냅다 허리를 숙여 그대로 제 언니의 배를 들이받아 버립니다. 뒷이야기는 생략하도록 할게요. 여하간 한 배에서 난 혈연끼리도 종종 그렇게 피 튀기는 전투를 벌이는데 배다른 형제는 말해 무엇할까요. 눈에 뜨일 때마다 신경을 긁어대는 기분이라고 해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그 동생의 생모는 투병 끝에 엄마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새엄마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왔는데요. 어떻게 봐도 좋아할 수 없는 새 가족임엔 틀림없죠.
그렇게 얼렁뚱땅 새엄마가 생긴 당신은 사는 곳마저 그녀의 집으로 옮기게 되어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테고요. 거기서 유일하게 정을 붙였던 건 오래된 책들 뿐이었죠. 그 책들엔 원래 주인의 이름이 쓰여 있었습니다. 어째서인지 그 이름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게 되고요. 전쟁의 포화 속에서, 도무지 정을 붙일 수 없는 새엄마와 갓 태어난 동생 사이에서 심적으로 방황하던 어느 날 밤, 죽은 엄마가 구해달라고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독일 폭격기가 정원으로 추락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초현실적인 사건 앞에서 고작 어린아이에 불과한 아이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아도 그리운 엄마의 목소리에 이끌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겠죠. 비록 그것이 당신의 마음 빈 곳, 상처를 이용해 제 목적을 채우려 하는 음흉한 존재의 부름임을 알았아도 저항할 수는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적국의 전투기가 추락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는 어린아이의 귀에 들려오는 엄마의 절박한 외침이라뇨. 비상식적이지만 순응하는 게 너무 당연하게 보일 정도입니다.
그리하여 빠져든 이상한 세계에서 당신은 차츰 깨달아 갑니다. 이곳을 지배하는 국왕이 있으며 왕이 노쇠하여 통제력을 잃어가는 까닭에 세계의 질서가 흐트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왕의 후계자가 될 자질이 있는 아이를 미혹해 데려오는 것은 요사스럽기 짝이 없는 '꼬부라진 남자 the crooked man'라는 것을요.
그보다 더 나쁜 것은 데이빗이 '꼬부라진 남자'라고 이름 붙인 사람이 꿈에 더 자주 나타난다는 사실이었다. (...) 그는 조롱하는 것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데이빗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국왕 폐하! 새로운 국왕 만세!" -53쪽
왕위를 물려받을 자질이란 별다른 게 아니었죠. 자신을 위해 누군가의 이름을 그에게 발설하면 되는 거였지만, 이름이란 어떤 순간에는 한 존재를 대변하는 압축적인 단 하나의 상징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자면 결국 누군가의 목숨을 팔아넘길 수 있으리만치 비겁하며, 그만큼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던 거죠.
그러나 꼬부라진 남자가 말했다. 그가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엄마를 찾아줄 수도 있고 함께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줄 수도 있다고 했다. 한 가지 부탁만 들어주면 그렇게 해주겠다고 했다. -237쪽
"사실 네가 떠나온 세계의 삶은 삶이라고 말할 수 없어. 하지만 이곳에서 너는 왕으로 살 수 있어. 품위 있고 고통이 없는 삶을 내가 보장하마. 그러다가 마침내 죽음이 찾아왔을 때, 편안히 잠들었다가 눈을 뜨면 네가 꿈에 그리던 천국에서 눈을 뜨게 해 주마.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천국이 있는 거니까. 그 천국의 대가로 내가 너에게 원하는 것은, 네 집에 있는 아이의 이름을 대는 것뿐이야. 어서 이름을 대! 너무 늦기 전에 어서 이름을 대란 말이야!" -419쪽
굉장한 유혹이었고, 절박하게까지 들리는 위협이었다고 생각해요. 세계를 지배하는 왕에게마저 협박을 일삼는 존재가 꼬드기는 말에 저항할 수 있었던 힘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할 용기를 낸 데에서 자라났겠죠. 그런 용기를 심어준 이들은 길 위에서 만난 인연들이었을 테고요.
살다 보면 내가 헤쳐나가야 하는 현실이 때론 너무 맵고 비참해서 차라리 눈을 감고 달콤한 꿈을 꾸는 쪽을 선택하는 게 훨씬 편할 것 같다는 유혹을 종종 받게 돼요. 하지만 그래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죠. 그건 때로는 한 편의 수난기 같기도 하고 모험담 같기도 해요. 어느 쪽이건, 우리는 동료가 필요하고 서로가 잘 해낼 거라는 믿음과 격려도 필요하죠. 그래서 또 언젠가 엔딩에 이르러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려는 순간(p.439) 언젠가 마중 나온 옛친구 하나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되는 것인지도 몰라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엔 이곳으로 돌아온단다." -440쪽
쉽게 갈 수 있지만 그러지 않기를 택했던 친구의 이야기가 필요한 순간 또 찾아올게요, 데이빗. and I'm so happy that you've finally found your happily-ever-after.
30주간의 프로젝트가 끝났습니다. 딱 한번 신정날이었던가, 도저히 시간이 안 돼서 한 번 펑크낸 일이 있긴 한데 그때를 제외하곤 아무튼 비교적 성실연재를 했던 것 같습니다 :)
짧게는 2주, 길게는 4주 정도 쉬어갑니다! 저는 그냥 글 쓰는 걸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고, 착실하게 글자수 쌓는 걸 보람으로 여기는 인간인지라 ㅎㅎㅎ 딱히 대단한 글이 아니어도 이렇게 소복소복하게 소박한 글을 쌓아가는 일을 (아마도) 계속할 것 같습니다. 그럼, 두번째 [책속의 그대들, 오늘도 안녕한가요] 브런치북을 오픈할 때까지 건강하세요! (라기에는 다른 글은 또 매일 쓸 예정이지만요)
-짱짱 긴 설날 연휴를 앞두고 쬐금 우울해진 담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