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풀이엽편 | 고유하다

다른 누구에게는 없는 독자적인

by 담화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건 언제일까?


자기소개할 때는 빼고. 거의 없지 않나?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라곤 거의 없는 나를 인플루언서라고 애들이 부른다는 걸 알았을 때는 정말이지 입만 떡 벌렸다.

그런 건, 공구도 자주 하고 협찬도 많이 받는 사람들한테나 붙는 호칭인 거 아닌가? 해봤자 매일매일 양말이나 찍어 올리는 나한테 이게 웬 말인지. 그런 의문을 드러냈을 때 친구들이 오히려 내 말이 의외라는 듯이 되물었다.


너 피드 인기 많아, 몰랐어?

그 ‘몰랐어?’의 조성 비율은 대략 이런 느낌이었다. 어이없음 40%, 납득 30%, 짜증남 20%, 부러움 10%. 당연히 그냥 내 추측이다. 어쨌든 솔직히 말해 썩 기분이 좋다고는 할 수 없다. 인기가 많다는 건 절반 이상은 부정적인 감정을 적당히 가리기 위해 둘러 씌운 덮개 같은 말이니까. 한 번은 그런 속내를 언니에게 털어놓았더니 언니의 대답은 실망스러울 정도로 심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 마, 그럼. 어차피 SNS는 인생의 낭비라잖아. 보니까 뭐 되게 대단한 거 올리는 것도 아닌 것 같더만.”


나는 억울해져서 그건 그 사람 인생관이잖아?라고 맞받아치려다 참았다. 만약에 퍼거슨만큼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다른 사람이 SNS는 현대인의 필수적인 세컨드 아이덴티티다, 뭐 이랬으면 다들 또 우와, 맞아, 그랬을 거 아닌가.


내가 SNS를 열심히 하는 덴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건 내가 온라인에 공개하는 나만의 개인 박물관이었다. 관장도 나, 큐레이터도 나. 관람료는 당연히 무료. 내가 본격적으로 SNS를 하기 전, 그러니까 익명의 팔로워로서 떠돌아다니다 우연히 본 어떤 계정의 피드가 너무 멋있었다. 누군지도 모를 그 계정주가 꼭 예술가 같았다.


사진 찍는 대단한 기술은 없는 것 같았는데, 항상 사진 속에는 엄지손가락보다 조금 큰 정도 사이즈로 보이는 보글보글하게 잔털이 일어나 있는 뱁새 인형이 들어 있었다. 그 뱁새는 계정주가 찍은 사진 어디에나 앉아서 제 존재를 뽐냈다.

식당 메뉴판을 들여다보기도, 도서관 서가에 앉아있기도, 판판한 초록색 나뭇잎 위에 발라당 누워있기도 했다. 그리고 늘 그 밑에는 해시태그 하나가 달랑 붙어있었다. 이를테면 #허기져 #뭐읽지 #신난다 같은.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었는데 보면 볼수록 흥미로웠다. 그저 작은 인형 하나에 불과한 뱁새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한마디의 말을 하면서 친근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올라오는 사진마다 열심히 댓글을 달았다. 댓글이래 봤자 해시태그로 달라붙은 말에 내 나름의 대답을 덧붙이는 수준이었지만. 그러니까 #허기져에는 –저두요, #뭐읽지에는 –학원교재 아님 뭐든지요 #신난다에는 –랄랄라 같은 수준의 말장난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것도 꾸준히 하다 보니 어느 날 계정주의 대댓이 처음으로 달렸다.


[siyoony님 항상 센스만점 댓 달아주셔서 피드 구경하고 싶었는데 비어있어서 조금 아쉬웠어요. 엄청 꾸준하셔서 재밌는 피드 만드실 수 있을 것 같은데]


꾸준하다...?

내가 가장 못하는 것이 인내심 있게 뭔가를 지속하는 건데 꾸준하다니. 나는 그 대댓을 한참 쳐다봤다. 그 글자에만 하이라이트가 씌인 것처럼 밝아 보이는 착각까지 들었다. 그런 게 꾸준한 거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뭘로 해? 그러다 문득 눈에 닿은 것이 패턴이 조금 요란하다면 요란한 체크무늬 양말이었다. 맞다, 나 양말 좋아했지.


언제부터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유난히 양말을 좋아했다. 발과 바닥 사이에 끼어야만 하는 숙명을 타고났으면서도 얌전히 불평하지 않고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양말이 상냥하고 착하다고 생각했다. 비닐에서 갓 뜯어냈을 때 보송보송하고 예쁜 모양 그대로를 유지하고 싶은 욕망이 새 양말에게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했다가 어릴 때부터 이미 실용주의자의 싹을 보였던 언니에게 모진 비웃음을 당한 뒤로 예쁜 양말은 그저 나만의 행복으로 남겨두었더랬다.

어느새 나는 서랍 가득 양말을 모으는 사람이 되었고 간혹 크게 마음을 먹고 비싼 브랜드의 시즌 한정상품을 하나씩 사들이는 기쁨까지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또래의 그 누구보다 많은 양말을 갖고 있는 사람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모아 왔던 양말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피드는 제법 귀엽고 재미도 있지 않을까.


나 혼자 재밌자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뜻밖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흥미로워했고 나의 컬렉션에 관심을 가져주었다. 그게 재미있어서 더 열심히 했다. 그냥 그게 다인데, 게시물을 올리기 시작한 초창기에 주로 들었던 다정한 격려와 감탄 대신 갈수록 비아냥과 까닭 모를 날 선 말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다음 편에 계속)





[표제어_고유하다/모티브_구달 「아무튼, 양말」]

사진: UnsplashKate Laine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뜻풀이엽편 | 천진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