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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Jun 16. 2024

내가 선택한 언어

미즈바야시 아키라, 다른 곳에서 온 언어

포털에서 '언어'를 검색하면 아래와 같은 결과가 뜬다.


생각느낌 따위를 나타내거나 전달하는 데에 쓰는 음성문자 따위의 수단또는  음성이나 문자 따위의 사회 관습적인 체계.


여기에서 명백히 드러나듯 언어는 그것이 종속되어 있는 문화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언어는 한 문화의 특질을 선명하게 반영한다. 그 언어의 사회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언어가 한 사람의 사상을 실천하는 실재적인 몸이라고 본다면, 


... 그러니까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다른 곳에서 온 언어 | 저자 미즈바야시 아키라 | 출판 1984BOOKS | 발매 2023.06.27.



위의 몇 줄을 적어놓고, 서랍을 닫아두고 벌써 몇 달이 흘러버렸다. 다시 말해 이 책을 읽은 지는 꽤 되었고, 책을 막 덮었을 즈음의 감흥 같은 것은 이미 깨끗하게 날아가버렸다는 말이다. 저자가 프랑스어를 아주 많이 사랑해서, 굳이 그 가시밭길을 걸으며 이 언어 속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했다는 사실 정도만 기억이 난다. 이래서 아무리 엉터리망터리라도 책을 읽고 나면 일주일 안에는 간단한 후기라도 적어놓으려고 하는 것인데, 어째서 이렇게 새카맣게 잊어버렸을까. 


여하간! 


내 주변에는 어쩌다 보니 외국어 능통자들이 좀 있어서 언어 이야기를 할 때면 늘상 좀 쭈구리가 되는 기분인데, 애호의 '정도'로만 재자면 빠지지 않을 자신은 있어서 (뭘 믿고 까부는지는 몰라도) 조금 떠들어보기로. 


저자가 어쩌다 이런 책을 쓰게 되었는지는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프랑스어는 어느 날 제가 빠져들기로 작정한 언어예요. 저는 그 언어에 집착했고 그 언어는 저를 받아 주었고... 그건 사랑에 관한 거죠. 말하자면 저는 프랑스어를 사랑하고 그 언어는 저를 사랑하는..." -16쪽 
일본어는 내 안에서 솟아 나온, 나의 바탕에 씨를 뿌린 언어이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항상 거기에 있었던 것이고, 말하자면 수직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프랑스어는 내가 인내심과 초조함을 동시에 간직하며 밟아 갔던 언어이다. 나는 프랑스어를 향해 나를 이동시켰다. 나는 그 언어를 채취하러 갔고 그 언어는 나를 받아들여주었다. -17쪽


인용문에서 감을 잡으신 분도 계시겠지만 이 책은, 한 편의 기나긴 언어와의 연애담, 로맨스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야말로 운명적인 만남에서부터 끝없는 밀당을 거친 영원한 해피엔딩, 정확히 천편일률적인 로맨스적 클리셰에 충실한 한 편의 애정 서사와 같다. 아니 정말이라니까요. 왜 불신의 눈빛으로...


저자가 모어에 환멸을 느꼈던 결정적 계기는 1970년대 일본 대학가의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낡고 닳아빠진 정치적 수사들과 공허한 투쟁의 언어들이 일상을 장악하며 저자는 무의미의 언설이 지배하는 상황을 점차 견딜 수 없어한다. 아마도 몹시 섬세한 사람이었으리라. 


말들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말들이 존재들과 사물들의 가장 깊은 곳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은 나를 불신의 상태에 놓이게 했고 나는 그 상태를 나 자신에게 감출 수 없었으며 무엇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게 감출 수 없었다. 
(...)
나는 보편화된 언어 인플레의 느낌에 쫓기고 있었다. 뭔가 도피의 시도를 기획해야만 했다. 프랑스어는 그때 유일한 선택지로 나에게 나타났다. -22쪽


그의 모어인 일본어가 진실한 경험에 부응하는 실존적 언어이지 못함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으니 도피처를 찾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그것이 프랑스어임은... 이분이 같은 중력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거주하는 것 같기는 한데 다른 차원의 지성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온당하게 한다... 그건 그렇고 언어와 존재에 관해 한 썰 푸셨던 철학자들도 계셨지만, 이 책에서도 적잖은 이야깃거리를 끄집어낼 수 있다. 

실제로 2개 국어 이상을 구사하는 이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모어와 외국어를 구사할 때의 자신의 정체성(까지는 아니더라도, 표현형이라 하면 좋을까)이 미묘하게 달라진다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하던데, 그것이 해당 언어가 태어나서 성숙하는 동안 언어가 제 몸에 품게 된 특성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점 역시 구체적인 사례 설명을 통해 재확인할 수 있었다. 


프랑스어와 더불어 살기 시작한 지 40년이 훌쩍 넘은, 저자의 맺음말과 가까운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오랫동안 질질 끌었던 글을 정리하고 싶다.


내가 프랑스어를 점령한 날, 나는 실제로 일본어를 그 본래적 순수성 안에서 영원히 잃었다. 나의 기원의 언어는 기원어의 지위를 잃었다. 나는 내 고유의 언어 안에서 외국인처럼 말하는 법을 배웠다. 두 언어 사이에서 나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일본인도 프랑스인도 아니다. 결국 나는 끊임없이 두 언어 안에서 스스로를 낯설게 만들어가고 있으며,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오가며 나를 언제나 어긋난 사람으로, 자리를 벗어난 자로, 두 언어의 사회적 관례가 자아에 요구하는 것에서 빗나간 사람으로 느낀다. 

그런데 바로 그 외떨어진 장소로부터 나는 말에 다가선다. 바로 그 장소, 아니 비-장소 non-lieu로부터 나는 프랑스어에 대한 나의 모든 사랑, 일본어에 대한 나의 모든 애착을 표현한다. -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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