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 빛을 찾아 조금씩 이동하는 나
영화에는 늘 어떤 과거에 얽매여 이미 판단을 끝내버린 듯한 역사교사 남편과 삶의 균형을 맞추려고 어제와 내일 사이에서 오늘을 사는 시 전문가인 아내, 그리고 자신에게는 ‘첫 남자’, ‘첫 여자’인 부모의 거울이 되어 부모의 고통을 헤아릴 수 없어 불안해하고 ‘당신들이 영원히 강인하기를 바라는’ 아들이 나온다.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크게 웃어버렸다. 코미디도 아닌데. 에드워드의 어떤 모습이 내 남편 같았고 무엇보다 약간은 과장된 듯한 행동과 목소리의 그레이스가 마치 나의 어떤 시절을 그려놓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29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에게 대화를 종용하고 응당 원하는 말을 하지 않아 답답해한다. 그러다 남편의 뺨을 찰싹 때리고 식탁을 뒤집어엎고 다시 남편에게 사과하는 일련의 행동을 보이는 그레이스가 나는 어떤 면에서 너무도 이해가 되었고 그게 웃음으로 표출됐다. 그 뒤로 이야기는 흘러가고 순식간에 100분이 끝났다.
한창 남편과의 갈등이 심했을 때, 일주일이 멀다 하고 싸웠다. 집안일과 모든 걸 돌봐줘야 하는 작은 아이를 키우는 데에 신경이 곤두서 있고, 몸과 마음이 피곤했을 때 남편의 사소한 행동들 하나하나가 다 못마땅했다. 조금만 마음을 내어 신경 쓰면 될 것을, 아주 조금 나보다 앞서 움직여주면 될 것을, 조금만 내 마음을 헤아려 도와주면 내가 훨씬 덜 너덜너덜할 텐데... 그렇듯 매번 나는 다정하지 못한 남편에게 화가 났다.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싸우길 싫어하는 남편에게, 긴 대화를 두려워하는 남편에게 어떻게든 싸움을 걸어 이 답답한 순간을 터트려버리고 싶었다. “우린 얘기를 잘 안 하는 거 같아.”, “이게 당신이 원하던 삶이야?”, “어떻게 해야 당신이 더 행복해질까?” 어떤 날은 마구 퍼붓듯 말하고, 울고, 소리 지르고, 아이와 둘만 남겨두고 밖을 나가 한참을 걷다 들어왔다. 어느 날 퇴근한 남편이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며 머리를 쥐어뜯으며 1년만 더 지내보고 지금과 변함이 없다면 이혼하자고 말했던 날도 있었다. 그때 더 알게 되었다. 남편은 불안과 고통의 시간, 갈등에 놓인 관계를 무엇보다 참기 힘들어하는 사람이구나.. 반면 나는 그런 흔들림과 떨림의 시간을 그것도 하나의 일상처럼 함께 겪어나가고 싶은 욕망이 컸다. 그래서 ‘이혼’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누구보다 차분하게 말을 건네며 그 어느 때보다 긴 대화를 나눴고 서로가 조금씩 누그러졌다. 여전히 가족을 안전한 울타리라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지만 내 미래는 어떻게 될지 그 누구도 모를 일이다. 평안하게 끝맺길 바라는 마음이 분명하지만, 바라던 바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은 늘 염두에 둔다.
에드워드는 결혼 29주년을 앞두고 자신에게 새로운 사람이 있다고, 더 이상 당신을 만족시켜 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날 캐리어 하나에 보스턴백 하나 짊어 들고 사랑하는 사람의 집으로 떠난다. 남편에게는 아내와의 결혼생활에서 어떤 시기가 지난한 전쟁- 전쟁 같은 사랑이었을까. 하루하루 견디며 살아남던지, 아니면 끝내야 하는 전쟁 말이다. 끝내야 한다고 결정한 순간 단칼에 떠나버리는 에드워드를 두고 그레이스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 나아갈까.
그날부터 그레이스의 ‘투쟁’이 시작된다. 정말로 남편이 떠나버릴지 몰랐고, 실제로 떠났고, 그의 마음을 되돌려보려 집안의 에드워드의 손길이 자주 닿던 곳- 냉장고 안, 수저서랍 등에 ‘사랑의 메시지’를 적어두는 등 애틋한 노력들과 절망 속으로 점철된 마음을 일으켜보려 자주 해안가의 Hope Gap을 오른다. 어떤 날은 억척스럽고 거세게, 어떤 날은 우울함으로 무장된 사람처럼. 그리고 아들 제이미와 함께 많은 대화를 나누는 곳도 Hope Gap이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너머에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를 보여주는 장면은 매번 큰 호흡을 하게 하고, 분명 그 자연의 풍광이 삶을 살아내게 했을 것이다.
우리가 투쟁이라는 단어를 쓰듯, 외국인들은 ‘struggle’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고 누군가에게 들었다. 김소연 시인의 산문집에 ‘struggle’에 대해 표현한 문장이 있다.
“우리는 알고 있다. 봄날에 내렸던 어이없는 폭설도 극렬한 투쟁임을, 아스팔트의 균열 사이를 비집고 나온 잡풀도 투쟁하는 중임을. 엉뚱한 행동, 기괴한 상상력, 불편한 공간, 까칠한 성격 등도 실은 투쟁의 산물이다. 우울하고 슬프며, 서럽고 괴로워 흐물대는 우리의 실상도 실은 투쟁의 산물이다. (...) 이렇게밖에는 할 수 없다는 천성과 이렇게 해야만 내가 조금은 행복해진다는 진심이 있을 뿐이다. 내팽개쳐진, 인간의 천성과 인간의 진심을 사모하기 위해 삶을 낭비해도 괜찮다는, 투쟁이 있을 뿐이다.”
그레이스가 불행에서 한 계단 내려와 점차 안정을 되찾으며 자살상담센터에서 일한다. 센터로 걸려온 자살하려는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응대하는 태도에서 그레이스와 너무도 잘 맞는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걸 에드워드도 그 누구도 변화시킬 수 없고, 결국은 자신의 모습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레이스의 재능, 자신이 가진 어떤 끌림, 고통을 겪어낸 투쟁의 시간으로 그레이스는 자신의 빛을 다시금 세상 밖으로 꺼내어 놓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그레이스의 시선집 작업을 제이미가 온라인상으로 구현해 내는 작업을 한다. 그의 동료들에게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시라며 <투쟁해 봤자 허사라고 말하지 말라>를 소개하고 아네트 베닝의 목소리로 읊는다.
“투쟁해 봤자 허사라고 말하지 말라 노동과 상처가 헛되며 적이 약해지거나 사라지지 않으며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지친 파도가 헛되이 부서지며 이곳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하는 듯 하나 저 뒤쪽에선 작은 개울과 만을 이루며 조용히 밀려오고 있지 않은가. 햇살이 들어올 때 동쪽 창으로만 오지 않으니. 앞에서 본 태양은 천천히 솟아오른다. 얼마나 느린가. 하지만 서쪽을 보라 밝게 빛나는 대지를.”
지나고 보니 알게 된 것이 있다. 결국 내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은 물론 진심으로 사랑하여 아끼고 즐겼던 시간을 포함하여 나의 불안했던 시간, 고통에 몸부림쳤던 시간, 고민과 번뇌에 사로잡혀 있던 그 시간들을 아름다운 흔들림이라고 바라보았을 때에 그때 관계 맺었던 좋고 싫었던 사람들, 곁에 있어 위로가 되어준 사람들, 그 모든 존재들이다. 다만 이렇게 넓은 시각으로 사랑을 대하고 있는 내가 부디 나의 빛을 찾아 세상 밖으로 꺼내어 그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손 놓아주길 진심으로 바라고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