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서로를 알지 못했으므로
그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래전에 스쳐 지날 수도 있었던
그때 그 거리나 계단, 복도는 어쩌란 말인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첫눈에 반한 사랑> 중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첫눈에 반한 사랑>을 읽는데, 머릿속에 맴도는 이야기가 있다.
'아... 어디서 봤더라? 비슷한 느낌의 이야기였는데...'
그러고 몇 분 있다 생각이 났다!
왓챠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 [헐왓챠에 이동진] 10화 <화양연화> 편에서 이동진 기자님의 주옥같은 이야기.
화양연화를 풀어내는 동진님의 이야기가 무척 섬세하고 논리적이고 감탄을 자아내지만 무엇보다 진짜 이 영화를 사랑하시는구나... 가 말하는 내내 화면을 통해 느껴진다. 좋은 걸 막 좋다고, 또 왜 좋은지 많이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의 표정과 목소리의 톤 같은 것... 이런 걸 접하고 나면 행복해지더라.
동진님은 모든 영화감독이 꿈꾸는
"시각매체 속에
어떻게 마음의 풍경을 담을 것인가
어떻게 추억이라는 것을 담을 것인가
어떻게 영원 속에서 찰나의 어떤 가치와 그 감정의 끓어오름을 표현할 것인가"
에 대한 것들을 이 영화에서 '왕가위만의 마법'으로 그려내고 있다고 거듭 말하고 있었다. 영화적인 마법... 사람의 능력을 뛰어넘는 이상한 힘으로 신기한 일을 해내는 마법... 그리고 많이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영화음악과 함께 아스라하고 애잔하게 기억하고 있을 '국수 사러 갔다 오는 장면'을 "공간에 머무는 시간을 시각화하는 왕가위만의 마법 같은 scene"으로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꼽았다.
모든 전제와 두 주인공의 행동도 똑같고, 공간들-국수를 사러 가는 밤길, 국숫집에 내려가는 오래된 계단 같은 것도 그대로 남아있지만 시간이 달라져가고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장만옥이 치파오를 서른 벌쯤 갈아입는 장치를 통해서 이 장면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장만옥의 달라지는 치파오를 눈여겨보면 서로 다른 날에 국수를 사러 갔다 오는 일상을 scene을 구분 짓지 않고 쭉 연이어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두 사람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여주지 않지만 몇 초 후(다른 날) 다시 국수를 사러 갔다 오면서는 두 사람의 눈인사 나누는 장면을 굉장히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시간이 흘렀고 두 사람이 서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나도 다시 영화를 보면서 인지하게 되었다. 이전엔 강렬한 음악과 매혹적인 치파오, 두 남녀의 감정에만 몰두해서 전혀 알아채지 못했는데, 이 해설을 듣고 깜짝 놀랐다! 왜 사람들이 이 장면을 이유 없이 그냥 좋아하는지, 영화는 보지 않았어도 이 장면을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지 알겠다.
동진님은 사랑이야기 보다도 더 중요한 테마는
'아득하게 오랜 공간 속에서 찰나적, 파편적인 시간들이 어떻게 그 공간 속을 스쳐지나 가는가'
라고 설득하는데,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이동진'이라는 사람이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조금 가늠해 볼 수 있다. 삶은 허무하고 외롭고 쓸쓸하지만, 그 쓸쓸함이 되려 위로가 되어줘서 다시금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도 보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런 삶의 태도에 '나도 그렇다'고 보태고 싶어진다.
"우리가 영화에서 다루는 4년이 아니라 굉장히 오랜 시간, 백 년, 천년 혹은 더 많은 시간 속에서 이 사람들이 막 그 감정 속에서 온갖 파도처럼 왔다가 또 밀려가는 그런 과정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공간은, 그것은 아파트 건물일 수도 있고 국숫집에 내려가는 어떤 오래된 계단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앙코르와트 일 수도 있죠. 다시 말하면 세계는 유구한데, 그 속의 사람들은 자기한테는 어마어마한 일이고 그것이 때로는 죽고 싶은 일이고 혹은 너무나 눈물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스쳐 지나가는 굉장히 짧은 찰나로서 그 순간들을 잠시 머물렀다가 공간의 나그네처럼 따나 가게 되고 다른 사람한테 인계한다는 것이죠. 그런 측면에서 보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앙코르와트에서 이 주인공이 사원의 구멍에다가 자기의 비밀을 봉인을 하게 되고 떠날 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왜 떠나게 되는 양조위를 비추면서 영화가 끝나지 않고 그가 떠나고 아무것도 없는 정말 수백 년 되고 오래된 앙코르와트의 그 낡은 오래된 사원 건물들 벽들을 쫙 훑으면서 보여 주면서 끝나는지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죠." - [헐왓챠에 이동진] 10화 <화양연화> 편
말하자면 모든 시작은
단지 '계속'의 연장일 뿐.
사건이 기록된 책은
언제나 중간부터 펼쳐져 있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첫눈에 반한 사랑> 중
다시 쉼보르스카의 시로 돌아와서...
이 시를 읽는데 문득 내가 잠시 머물렀던 어떤 공간들이 떠올랐다.
집-학교-학원의 테두리에서 늘 걸어 다녔던 골목길
남자친구와 걸었던 부산의 명소들
해인사의 너른 잔디밭
대학 졸업반 때 마땅히 갈 곳도 없고 으레 가야만 했던 중앙도서관
치열하고 고통스러웠던 2층 직장과 원룸
올림픽공원, 씨네코드 선재, 광화문 교보문고, 정독도서관, 돌담길...
그 공간에 머무르면 보냈던 시간이 아주 선명하게 피어올라 행복해지기도 하지만 지금에 충실하다 보면 또 내가 그때 그곳에 있었던 게 맞아? 하면서 아스라해짐을 느낄 때도 있다. 그 공간에서 해맑게 웃고 걷고 말하고, 예쁜 옷을 입고 거리를 누비고, 이유 없는 눈물을 쉼 없이 흘리고, 머리를 쥐어짜며 노트를 들여다보고, 사랑을 나누고, 넘쳐나는 에너지로 열심히 돌아다니며 일했던 나를 가만히 그려본다. 지금 그 공간에서 누군가 또 사건을 만들며 살아가겠지 하면 피식 웃음이 나오다가도 응원하는 마음을 보내게 된다. 그래도 모두에게 주어진 소중한 삶이니 어떻게든, 어떻게든 나만의 방식으로 잘 살아내 보자고 더불어 나에게도 함께.
꽤 오랜 시간을 들여 시를 읽고 또 관련된 자료 찾아보고 동진님의 영상을 보고 또 이렇게 글을 쓰고-
그럼 아주 아주 가끔 '아, 이 시간에 좀 더 유용한 뭔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적금은 어디 은행 이자가 높지? 사촌이 세원이 읽으라고 영어책이랑, 입던 옷가지들 신발들 잔뜩 주셨는데 책장에 꽂고 아이가 잘 읽고 쓸 수 있도록 정리는 언제 해? 베란다 식물들을 좀 더 보살펴야 하지 않아? 곧 여름방학인데, 계획은...' 뭐 이런 생각들을 하며 이내 마음이 촉박해진다.
하지만...
나의 소중한 시간들이여
나의 야속한 시간들이여...
문학을, 영화를, 음악을, 좋은 글이나 그림들은 내 몸에 차곡차곡 어떤 형태로든 쌓여서 내 생활에 가끔씩 큰 도움을 준다. 차를 타면 꼭 안전벨트를 한다. 그 안전벨트는 인생에 단 한번 쓸모 있는 것이지만... 조금씩 천천히 넓어지고 깊어지는 내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기 때문이다. 그럼 인생에 단 한번 누군가에게 아주 쓸모 있는 사람으로 소용되지 않을까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