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말이죠. 회색고래가 보여요."
‘당신은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인가요?’라고 누군가 내게 물어온다면 나는 단연 ‘달이예요.’라고 스스럼없이 말할 것이다. 어스름이 내린 저녁 하늘이나 어둡고 깜깜한 밤하늘에 달이 떠 있으면 그 순간 내 기분이 어떠했는지 상관없이 일단 기분이 좋아진다. 나에 대해 잘 모르는 남편도 내가 달을 아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건 잘 알고 있고, 딸 세원이 아주 어릴 적부터 자기 전 매일 밤 달님에게 기도를 드렸었다. ‘달님, 우리 세원이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라게 해 주세요.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 고마워요, 달님. 사랑해요.’ 늘 똑같이 소원을 빌었다, 달에게.
달 다음으로는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을 나열하면 몇 가지가 더 있지만 동등한 비율로 고래를 동경한다. 미지의 어떤 세계를 동경하듯. 고래를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들뜨고 경이롭고 또 한편으로는 슬픔의 이미지로 내게 다가온다. 가장 최근이라면 넷플릭스에 <우리의 지구> 다큐멘터리와 15년 전 독립하여 혼자 살 때 새벽에 잠이 깨어 본 혹등고래에 관한 다큐멘터리, 2023년 전북 부안에서 죽은 채 발견된 보리고래의 이야기까지 모두, 산업화와 바다쓰레기, 기후문제로 고래의 어두운 모습이 자주 목격되어 그런 것 같다. 그럼에도 고래는 마치 거대한 회색빛 분화구와 거친 표면의 달과 닮아 있다. 우리와 같은 포유류. 깊은 바다에 사는 거대한 동물. 그 존재만으로도 하나의 자연인 고래.
이 책을 읽으면서 자주 구글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구글지도를 보면서 도린과 맥스의 여정에 나도 동행했다. 덕분에 멕시코의 게레로, 바하칼리포르니아를 시작으로 티후아나, 베니스비치, 몬트레이 만, 데푸 베이, 펏젯 사운드, 로사리오 해협, 조지아 해협, 산후안 섬, 로페즈 사운드, 트소와센, 스카이 트레인, 케치칸, 주노, 스캐그웨이, 칠쿠트 강, 글라치어 만, 훼티어, 코디액 섬, 베링 해, 애투섬(베링해의 가장 큰 섬), 추크치해, 알래스카, 포인트 호프 그리고 결고 잊을 수 없는 장소인 우트키아빅에 이르기까지- 지도를 확대해서 살펴보며 한번도 가보지 못한 장소들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우트키아빅에서 도린과 빌리가 함께 간 피자집도 지도에 있었다! 포장되어 있지 않은 도로와 곳곳의 눈 쌓인 건물과 물건 더미가 있는 알래스카 최북단의 길을 나도 걸어볼 수 있었다. 저자 도린이 맥스와 함께한 장소에 대해 다정하고 세세하게 기록을 해둔 덕분에 나 또한 허투루 지나가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책에서 고래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이를테면 “캄캄한 겨울, 북 베링해의 해빙 밑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북극고래들은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다.”와 같은 문장을 읽으면 잠시 책을 덮고서 북극고래 노랫소리를 검색해서 들어보고 그 소리가 또 좋아서 혹등고래 소리도 들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알류트 원주민, 우난간(Unangan)은 열도에 있는 한 섬을 바람이 태어나는 곳이라고 부른다.”라는 문장을 접하면 스마일 웃음 모양의 알류샨 열도의 섬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가장 마지막 섬인 애투섬을 나도 모르겠는 이상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들여다보곤 했다. 또 기항지였던 스캐그웨이(skagway)에서 "1896년부터 1990년까지 1,000명 이상의 여성들이 칠쿠트(chilkoot) 또는 화이트 패스를 건넜다."라는 문장을 읽고 클론다이크로 향하던 용감무쌍한 여성 개척자들의 이야기를 검색해서 찾아보았다. 책과 지도를, 책과 검색엔진을 번갈아가며 읽고 또 보는 동안 진심으로, 진심으로 즐겁고 행복했다.
이 책은 도린과 그녀의 아들 맥스가 회색고래의 이주를 함께하는 에세이다. 그 안에는 7년 전 BBC 기자였을 당시 알래스카 우트키아빅으로 여행했던 일과 함께 자신과 아들 맥스와의 관계, 남편과의 관계, 가족-엄마와의 관계, 반려동물 조랑말 브램블과의 관계, 우트키아빅의 이누이트 사람들과 특히 빌리와의 관계와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자신의 상황 등 저자의 인생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저자가 왜 ‘고래’를 말할 수밖에 없었는지, 책 말미의 문장처럼 ‘고래에게 노래를 불러주었고, 바다의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는지, 은행에서 1만 파운드를 대출받아 떠나는 고래 이주 여행이 도피처나 엉뚱한 일이 아니라, 저자의 삶을 들여다보면 되려 이 흐름들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북토크에서 정혜윤PD가 말한, 힘들 때 왼다는 문장인 “어디선가 고래 한 마리가 숨 쉬고 있다”를 나도 외어 보았다. 책을 2주 전 일주일 간 읽고 아이 방학으로 부산에 1주일 머물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그 사이에도 이 문장을 많이도 외웠다. 진짜 어디선가 깊고 넓은 바다에서 회색고래가 새끼를 몸에 바짝 붙이고 거칠고 먼바다를 끊임없이 '움직인다'라고 상상을 하면 마음이 안정되고 어떤 불평도 잠시 멈추게 되었다. 신기하다. 나도 도린만큼이나 고래를 믿고 의지하나 보다.
도린은 진심으로 고래에게 몸을 기대었다. 보다 간절하게 닮고 싶은 마음으로 회색고래를 따라가며 그들의 삶을 잠시 빌려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이는 어떻게 키우며, 위험이 닥쳤을 땐 어떻게 하는지, 사랑과 기쁨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누군가의 슬픔이나 죽음을 목격했을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부서진 자신의 삶을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는지... 오래 바라보고 지켜보고 마주 보면 잠시라도 고래의 세계로 건너갔다 올 수 있지 않을까. 도린은 고래의 소리를 들었고 다시 태어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