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아"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새벽 1시. 도착하자마자 양가에서 싸주신 음식들 상할라 소분해서 냉장고에 차곡차곡 넣는다. 부산에 다녀와 집에 오면 늘 하는 일이다. 까무룩 잠이 들었고, 아이 소리에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아침밥을 준비한다. 미역국에 무김치. 친정엄마가 무김치를 물에 씻어 쫑쫑 썰어주면 잘 먹을 거라며 아침상에 낸다. 아이는 28개월 인생 첫 김치를 아주 맛있게 먹는다. 작은 입이 오물오물거리며 먹는 아이가 예뻐서 난 배가 부르고 그 모습은 지체 없이 엄마를 불러일으킨다. 엄마의 한없이 넓고 크고 깊은 사랑, 그 안에서 나는 분명 마음껏 유영하며 자랐구나... 비로소 깨닫는다.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내 엄마의 사랑'을 받은 것만으로도 난 이미 행복한 사람이다.
엄마
녹두색. 젊었을 때는 화려한 색보다 희끄무레한 색을 좋아했지. 옷들도 다 그런 색이었고. 지금은 화려한 색들이 좋아. 특별하게 딱 꼽으라면 없어.
엄마
옛날에는 관심이 많았어. 성격이 워낙 내성적이었고 조용한 노래들을 좋아했어. 근데 기억이 안 나. 최진희 노래들, 영화배우 문희...
엄마
(쓴웃음) 다 사그라들었어. 공부? 하고 싶었지. 동생 돌보느라 안 갔어. 가고 싶다고 말 한번 안 했어. 형편을 아니까.
엄마의 많은 부분들이 녹두색처럼 희끄무레 해졌나 보다. 엄마는 애써서 기억해내고 생각하려 노력해야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또 관심 있어했는지를 아는 인생의 어느 지점에 있다. 계절로 치면 겨울일까? 그리 좋아하는 것도, 또 그리 싫어하는 것도 없는 중용의 상태인가. 그래도 쌓인 눈들을 빗질해가며 머물러있는 봉인되어 있는 추억들을 찾아내었다. 배꼽 빠지게 웃다가 눈물짓다가 때론 서로 멍해졌다. 아이를 재우고 모녀가 거실에 앉아있다. 무슨 색을, 어떤 노래를 좋아하냐고, 대뜸 꿈이 뭔지를 물어도 나의 멋쩍음엔 아랑곳하지 않고 자연스레 대답해 준 엄마. 새벽까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도 느꼈을까. 엄마는 어떻게 해서 '한없이 넓고 크고 깊은 엄마'가 되었나 궁금해하는 나의 마음을.
엄마는 어떻게 해서 '엄마'가 되었을까. 내년이면 70세를 바라보는 엄마도 그저 풋풋한 감성을 지닌 소녀였고,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즐겨 입던 여자였고, 거창한 꿈은 아니었더라도 삶에 대한 애정과 앞으로 펼쳐질 당신의 삶에 부푼 기대들로 가득했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어쩌면 그러한 시절들 속에서의 내 모습과 엄마가 별반 다르지 않을 거다. 그러나 그 여인이 처음으로 '엄마'가 되었고 거대한 시간들이 흘러, 결국 두터운 세월의 옷을 입어낸 '한없는 엄마'와 이제야 '새내기 엄마'인 나는 차이가 크다. 약간의 행복했던 시간과 대부분의 고된 시간과 포기의 시간, 어쩌면 고통의 시간들이 엮여 일흔을 앞둔 엄마를 탄생시켰다. 그 두터운 옷을 벗어내면 다시 한 여인이, 풋풋한 감성을 가진 소녀가 있을 터이다. 내 나름의 인터뷰는 천천히 텀을 주며 진행되었다. 아침밥을 같이 먹으며 던져진 질문이 잠들기 전 거실 소파에 앉으면 대답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렇게 같이 일주일을 보내며 왼손을 빼드리고 오른손을 빼드리며 두터운 옷을 벗겨드리려 했다. 따뜻한 5월의 우리 엄마가 그 두터운 옷을 벗어내어 곱게 개어두고 가벼운 차림으로 햇살을 담뿍 받으며 남은 생을 살아가시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인터뷰를 했다.
엄마
힘든 것도 모르고 키웠어. 우울할 때? 나는 우울할 겨를이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자식들 먹이고 씻기고, 아빠 뒷바라지하면서 생활비 아껴가며 저축하고 그랬어. 만 며느리니 때마다 너희 들쳐업고 시골 가서 한두 달 있으면서 농사일하고 바쁘게 살았지. 아빠 형제들 우리 집에 머물 때 챙겨야 했고. 속상한 건 있어. 어릴 때 언니랑 너 싸운 거. 너는 사춘기를 심하게 앓았는데 그건 속상하지 않아. 단지 언니랑 너 싸울 때마다 엄마는 그게 그렇게 속상하더라. 별것도 아닌 걸로 말다툼해서 싸우고. 엄마는 그냥 내버려 뒀다. 말해도 안 들었으니까. 언제까지 싸우나 그냥 보고 있었지. 엄마, 아빠는 싸운 적이 없는데 너희들 그렇게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많이 속상하더라.
내 부모님도 싸운 적을 못 봤어. 아버지가 노름을 했었는데 나 같으면 아버지랑 싸웠을 것 같은데, 엄마는 참으시더라. 아버지도 엄마가 꽁알 꽁알 해도 그냥 가만히 계시니 싸움이 안 되는 거지. 아버지 다 좋은데 딱 하나, 노름. 노름 때문에 내가 많이 속상했지. 말도 못 하게 했으니까. 엄마는 늘 나를 보냈어, 아버지 데리고 오라고. 그럼 저녁도 굶고 쪼그려 앉아 아버지 노름판 끝내고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나오시면 손잡고 집에 오고 그랬어. 그럼 엄마가 밥 차려 주시면 같이 먹고. 어휴.. 그 세월이 말도 마. 두 분이 싸우지 않은 게 신기해.
엄마
나는 무난하게 살아온 것 같아. 굴곡 없이 무난하게. 내가 막 돈을 벌어야 했다던지.. 그런 큰 고생하지 않고 산 것 같아. 그저 건강하게 가족들 챙기는 것. 생각해보면 내가 욕심이 없었다는 증거인 것 같아.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욕심이 없어. 주어진대로 살았고 받아들이고 물 흐르듯 보낸 것 같아.
엄마
(웃으며) 그때는 엄마가 좀 젊었겠지. 지금은 뭐... 없어. 그래서 너희들 연애 많이 하라고 이야기 많이 했는데! 연애 많이 했어? 나 모르게 했어? (웃음)
엄마
몇 번 이야기한 것 같아. 울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 나는 우리 아버지한테 무한한 사랑을 받은 것 같아. 워낙 말 수가 없으셔서 표현하지 않으셔도 내가 그리 느꼈어. 나 낳고 엄마가 돌아가시고 새엄마 오시고 나서 '어린것이 얼마나 상처를 받을까' 생각하신 것 같아. 저녁노을 바라보며 같이 걸을 때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을 아직도 기억해. 그게 나는 아주 따뜻했어. 엄마를 떠나보낸 딸을 아버지는 마음으로 안아주셨던 것 같아. 어릴 때 아버지랑 같은 방에서 잔 것도 나한테는 따뜻한 일이야.
그런데 나도 우리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사진 한 장 없고... 나는 '엄마의 사랑'이 뭔지 몰라. 그래서 내 자식들에게 최대한 엄마로서 듬뿍 사랑을 주려고 내 딴에는 부단히 노력했어. 너희들에게 단 한 번도 '야'라고 불러본 적도, 손찌검을 한 적도 없지. 가능한 너희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엄마는 배려하고 자유롭게 키우려고 했단다.
엄마
대견해. 언니랑 막둥이는 엄마랑 가까이 살잖아. 멀리서 혼자 세원이 키우는 게 많이 안쓰럽지. 그래도 그게 네 일인데 어쩌겠어. 세원이는 잘 클 거야. 너를 많이 챙겨. 늘 네 건강을 우선으로 해야 해.
엄마
내 꿈은 우리 아버지처럼 85살 즈음해서 편안히 죽는 거야. 잠결에. 오래 살고 싶지도 않아. 막 아파서 너희들 걱정하지 않게 하는 것. 지금처럼 건강하게 내 일 하면서 보낼 거야.
엄마에게 준비했던 질문들을 건네면 엄마는 옛날 고향 풍경과 몇 안 되는 추억들, 결혼 초의 에피소드들을 꺼내 들려주셨다. 엄마의 고향 하동에 가설극장이 오면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 갔다고 했다. 어떤 영화를 봤는지 기억하진 못하고 단지 친구들과 모여서 웃고 떠들며 걸었던 시간들을 떠올리셨다. 영화 나자리노의 주제곡 'when a child is born'을 엄마가 흥얼거려 나도 안다며 흥분해서 핸드폰을 검색해 같이 들었다. 아마도 엄마의 감수성이 언니를 소설가로, 남동생은 편지 쓰길 좋아하는 경찰관으로, 나를 브런치 작가로 스며들게 한 것 같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자주 듣고, 꽤 먼 거리를 걸어 가설극장에 가고, 노름판에서 당신 아버지가 나올 때까지 모닥불 앞에서 저녁을 굶으며 기다렸던, 그런 시간들이 엄마에게 스며들어 있다.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욕심부릴 여유도, 방법을 알아볼 환경도 주어지지 않았던 거겠지. 누구와도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고, 새엄마가 눈치 주지 않았지만 그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알아서 눈치를 보며 행동하고 선택했을, 그래서 꾹꾹 참고 견뎌내는 힘이 어쩔 수 없이 생겨나 버린 것 같아 마음 깊은 곳이 아린다. 하지만 지금 어느 누구보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삶을 살아가고 계시니 엄마가 살아내어 오신 자국들이 눈부시게 환하고 선명하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이 부시게'라는 아주 흔한 문구가 다시금 귀하게 다가온다. 엄마의 남은 인생도 반짝반짝 빛이 나고 눈이 부시리라. 그리고 나는 분명 엄마가 말씀하신 그 꿈이 이뤄질 거라 생각한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