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방식의 변화, 조직의 기본 가정
저처럼 일반 사무직으로 일하고 계신 분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사용 중이실 수도 있고요. RPA는 사람이 엑셀, 웹, ERP 등의 프로그램으로 수행하는 단순 반복적인 업무를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쉽게 자동화하는 기술 중에 하나인데요.
몇 년 전 워라밸, 주 52시간 근무제 같은 이슈들로 업무 효율성 확보가 기업의 큰 과제로 떠오르면서, 많은 회사들이 그에 대한 솔루션 중 하나로 RPA를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즘도 검색해보시면 '어떤 회사가 RPA를 도입해서, 업무 시간을 얼마나 줄였다더라'류의 최근 기사를 쉽게 찾아보실 수 있지요.
제가 RPA를 처음 접한 건 2018년입니다. 회사 IT 부서에서 관심을 갖기도 전이었는데, 당시 본부장님 지시로 재경본부 자체 TFT가 구성되었고 저는 그 일원으로 참여했어요. 어쩌다 보니 주축 멤버가 되어서 시범 운영을 위한 개발, 직원 참여를 위한 사용법 교육/설문 등 조직에 RPA를 정착시키기 위한 전반적인 과정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배운 건 참 많았는데, 일단 결과만 얘기하자면 잘 안됐어요. TFT 운영 기간에 비해서 정량적인 성과를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그저 RPA를 적용할 업무 과제를 발굴하고, 그것을 물리적으로 잘 구현하는 일에만 열중했는데요. 지금 와서 보니 RPA 도입의 성공은 결국 조직문화의 성공에 달려있는 문제였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MIT 슬론 경영대학원 명예교수인 에드거 샤인의 이론입니다. 조직문화를 1. 겉으로 드러나는 인공물, 2. 조직이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가치, 3. 구성원들이 당연하다고 믿는 암묵적인 기본 가정 세 가지 차원으로 구분하고 있는데요.
회사가 어떤 변화를 시도할 때는 세 가지 차원이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환경과 조직이 외치는 대외적인 구호에 변화를 준다고 하더라도, 암묵적인 기본 가정이 변하지 않는다면 변화의 본질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운 것이죠.
저희 조직이 도입하려고 했던 'RPA’라는 기술은 인공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입을 위한 주된 논리로 내세웠던 ‘단순 반복 업무는 RPA에게 맡기고, 인간은 더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구호는 표방하는 신념과 가치라고 볼 수 있겠지요.
RPA를 활용해서 일하는 방식을 변화시키겠다고 한다면 그에 걸맞는 조직의 기본 가정이 갖춰져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두 가지 에피소드를 이야기해보려고 해요.
RPA를 적용할 업무를 발굴하는 과정에 있었던 일입니다. 본부 내 한 동료 직원의 업무를 자동화하기 위해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었어요. 그 사람을 A라고 할게요. 여러 시스템에서 추출한 대량의 자료들을 엮어서 엑셀로 정리하는 작업이었는데, A는 전체 업무 프로세스 중 50%에 대한 설명이 끝났을 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여기까지만 구현해주시면 돼요."
그때 눈치가 좀 있었어야 했는데. 저는 “뒷부분도 충분히 자동화가 가능할 것 같으니까 설명해주셔도 괜찮아요.”라고 말했고, A는 한 번 더 단호하게 얘기했어요.
"아니에요. 여기까지만요."
저는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하고 서둘러 인터뷰를 마쳤습니다.
평소 A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자기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야근도 마다하지 않고 방대한 자료를 직접 핸들링해가며 정기적으로 보고서를 만들었어요. 그 결과물로 조직에서 자신의 실력과 성과를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몇 시간, 또는 며칠씩 들여가며 해내던 일들을 소프트웨어가 단 몇 분만에 해결할 수 있다고 하네요. 어찌 보면 반감이 드는 게 당연합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따르는 구성원의 반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직에서 인정하는 성공과 성과에 대한 기본 가정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대량의 데이터를 모으고 정리하느라 야근을 하는 직원이 열정적이고 성실한 인재로 대우받는다는 암묵적인 기본 가정이 조직 안에 여전히 남아있다면, 직원들은 기존의 업무 방식을 쉽게 포기하기 어려우니까요. 저희 조직에는 이런 선언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 조직은 더 이상 데이터를 모으고, 정리하는 단순 반복 작업을 위해 야근하는 직원을 좋게 평가하지 않겠다. 그런 일들은 하루빨리 RPA에게 맡기고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는 직원을 우수한 인재로 대우하겠다.’
일하는 방식의 변화에 맞는 비전을 구성원들에게 제시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에 걸맞은 피드백과 평가를 함으로써 조직의 기본 가정이 정말 변화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일도 반드시 병행되어야 했고요. 아마 그랬다면 직원들이 기존의 방식을 버리고, 조직이 새롭게 정의한 성공의 모습에 부합하기 위해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 조직은 자동화 프로세스의 개발을 외주사에 맡기지 않고, 직원들이 스스로 개발하고 활용할 수 있는 시민 개발자(Citizen Developer) 양성 형태의 RPA 도입을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소프트웨어 사용법을 먼저 익힌 소수의 직원들이 다른 직원들에게 노하우를 전파하는 방식이었지요.
몇 차례 시연을 통해서 RPA에 대한 개념을 본부 구성원들에게 전달했고, 이제는 직원들의 주도로 본격적인 학습과 개발을 추진해야 하는 시점이었습니다. 어느 날 본부 직원들이 모두 모인 회의실에서 한 실장님이 제안을 하나 하셨는데요. (지금은 퇴직하고 안 계신 분이라 이렇게 글을 써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 자기 업무에 RPA를 적용해 그 결과를 나에게 가져오는 사람에게는 내가 승진을 보장하고, 상금으로 100만 원을 지급하겠습니다.”
순간 회의실 공기가 일렁이는 걸 느꼈습니다. 당시 저희 조직에는 주니어급 인원이 많았던 탓에 대리 진급조차 쉽게 보장되지 않는 상황이었거든요. 그 해 승진 대상자였던 몇몇 직원들은 그날부터 가장 먼저 그럴싸한 결과물을 내기 위해 야근까지 해가며 사용법을 익히고, 개발을 진행했습니다.
저는 TFT 주축 멤버였기 때문에 다른 직원들보다 더 많은 개발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고, 동료들에게 지식을 전파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떡하죠. 저도 그 해 대리 승진 대상자였어요. 저와 경쟁해야 하는 동료가 저에게 RPA 사용법을 물어오는데 그게 참 불편했습니다. 그냥 대충 알려주고 제 거 개발하기 바빴어요. 분명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느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다행인 건지, 승진 보장은 나중에 가서는 흐지부지 없던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승진 시즌이 다가오면 다른 대상자보다 눈에 띌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는 경쟁 논리는 일반적인 기업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본 가정입니다. 하지만 저희는 RPA를 시민 개발자를 양성하는 방식으로 정착시켜야 한다는 그림을 가지고 있었잖아요. 직원들이 자율적으로 학습하며 익힌 노하우를 서로 나누면서 함께 성장하는 모습을 추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승진을 보상으로 내걸고 개발 경쟁이라니, 직원들의 경쟁심에 불을 지른 샘이지요. 적어도 RPA라는 주제 안에서 만큼은 옆에 있는 동료가 경쟁의 대상이 아닌 협력의 대상이라는 기본 가정을 정착시킬 수 있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RPA 뿐만 아니라 업무와 관련된 새로운 기술이나 제도를 도입하는 일이라면 모두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혹시 그런 일을 담당하고 계시다면, 변화의 시도가 단순히 표층적인 개선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조직의 암묵적인 기본 가정도 함께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꼭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사실 최근까지도 그때의 실패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냥 ‘다들 RPA에 별로 관심이 없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말았었지요. 지금은 그룹 정책에 따라 RPA 개발/운영에 대한 역할이 IT 부서로 이관되기도 했고요.
조직문화에 대한 관심과 나름의 이해를 갖게 되니까 과거의 이야기를 이렇게 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직문화라는 주제는 직무와 관계없이 모든 월급쟁이들이 필수적으로 가져야 할 교양이자 경쟁력이라는 것을 이번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더 확신하게 됐어요.
개인적인 생각과 경험들을 너무 장황하게 써내려 간 글이 된 것 같기도 한데, 조잡한 글 속에서도 찰떡같이 인사이트를 얻어가실 수 있길 바라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