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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젠가 Dec 09. 2023

회식중에 고발과 민원이 난무했어요. 행복합니다.

시스템이 중요합니다.

나는 지금 근무하고 있는 곳에서 성고충 상담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사실 나의 의지와 능력과는 상관없이 이 업무담당자가 되어 버렸다. 조직이란 그런 곳이다. 일이란, 위에서 시키면 해야 하는 것이다.

어느 날 교육청에서 실시하는 직무 연수 교육이 있으니 네가 가서 그 교육을 받으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사실 지시랄 것도 없었다. 교육청이 성고충 담당자 연수를 기획했으니 각급학교 담당자는 와서 받으라는  공문이 하달되었다. 그리고 그 공문이 나에게 배정된 순간 나는 의지나 능력과는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그 업무담당자가 된 거다. 배정된 공문의 접수자가 되면 교육을 받으러 가야만 하는 시스템.


그 연수는  꽤 어렵고 심도 있는 연수였다. 기존의 직무연수들은 대부분 내 전공과 관련된 것이었다면 이 연수는 변호사와 노무사들이 와서 수십 가지 법률과 사례들을 알려주었다.

성고충 심의위원회가 내부에서 열릴 경우 처리 절차에 대한 전달 연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게 업무 담당자가 된 것이다.

 연초에는 우리 기관에서 성희롱이나 성비위가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교육을 실시하겠다 하고 계획서를 수립해 놔야한다. 성폭력(4대 폭력 /성희롱 성폭력 성매매 가정폭력) 예방교육계획을 수립해서 내부 기안을 올려 결재받아야 한다.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는 교육도 실시해야 한다.

내가 이 업무 담당자가 돼버린 것은 법령 때문이다.  양성평등 기본법 31조에 따라 상시고용자 30인 이상 사업장에는 반드시 이 직무자가 배치되어야 하고 심의위원회도 구성되어 있어야 한다.


 아무튼 에 따라 이렇게 기관 구성원들의 인식과도 연결되는 성인지 향상 교육을 실시하고 혹시 모를 교직원들의 성비위를 방지하는 예방 교육을 담당하는 업무를 하게되었다. 이 업무 적임자는 사실  그 기관에서 힘이 있고 영향력을 발휘한 수 있는 고위직, 관리자 이상 그룹이라고 생각한다.

부서 단위 부장 이상 혹은 교감 정도?

 

그런데 부서 단위 부장이나 교감이상의 관리자들의 인식과 연령층, 그들이 오랫동안 몸담아온 조직 문화를 생각해 보면 그건 사실 어려운 일이다. 어떤 시스템이든지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주어진 업무 수행자의 의지나 인식과도 일치하는 게 제일 이상적인데 사실 교직사회에서 가장 보수적, 수직하달 문화, 남성위주 혹은 남성선호 사고방식에 익숙한 그룹들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담당자가 이것은 "법령" 이것은 "시스템"이라고 주장해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인식이 형성된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단번에 바꾸기는 어렵다.


스쿨 미투 이후로 교직사회내 성 비위에 관해서는 매우 엄격한 징계 기준이 세워졌다. 또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50~60대 이상의 일부 남성 그리고 교직사회의 보수문화에 익숙한 50대 이상의 일부 여성들 조차 내가 주장하는 소위 '성인지 감수성'이란 진보주의 정치성향과 같은 것 혹은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고 나대는 여자들이 주장하는, 그저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개념에 대해 어려운 단어를 조합한  것이라 여기며 매우 불편해했다.


업무담당자로서 그 일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여전히 법은 멀고 현실은 차가웠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건 본인의 신념이나 인식과는 상관없이 이 조직의 구성원들은 법과 원칙은 꼭 준수하며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란 것이다. 법령과 시행령은 너무 중요하다. 지침이란 것이 생기면 그건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코로나시절, 비록 머릿속엔 이건 왜 때문에 이래? 혹은 이게 맞아?라는 물음표가 생기더라도 그래도 지침은 지침이니까, 하면서 성실히 열심히 학교방역 가이드라인지켜고 교육시킨 직업군은 역시 교사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 법과 원칙이라는 아주 중요한 시스템의 힘을 믿기로 했다.

미혼의 여성교사에게는 느그 아버지 뭐 하시노?

기혼의 여성교사에게는 느그 남편 뭐 하노?를 당연하게 물어보며 개인정보를 캐물어보는 사람에게

"선생님은 왜  남성교사에게는 느그 부인 뭐하노 혹은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하고 물어보지 않느냐, 남성교사는 그 사람 자체만으로 신원이 보장되지만 여성교사는 남편이나 아빠라는 배경까지 첨부돼야 신원이 보장된다고  생각해서 그런 걸 물어보느냐" 하고 따져 묻지 않았다

남성교사는 어떤 옷을 입어도 규제하지 않지만 여성교사의 옷차림을 가지고 내가 연장자라서, 너희들 위해서 하는 말인데 교사답게 정장스커트로 포멀하고 단정하게 입고 다녀라 하며 여교사들만 따로 모아 교육을 시키는 소위 무서운 언니? 교사에게 왜 옷차림을 규제하냐 그리고 의상에 관한 원칙을 정하고 싶다면 그럼 남성교사에게도 적용시켜야 하지 않느냐 하며  "언니 저 맘에 안 들죠" 하고 따져 묻지 않는다.


출산휴가를 쓴 기간제 교사는 다음 계약에서 제외되었지만 출산휴가를 쓰지 않고 출산 직전에 조용히 사직을 한 기간제 교사는 알아서 일을 복잡하게 하지 않고 물러났기 때문에, 애 좀 키우고 나서 다음에 지원하면 뽑힐 거라는 말들, 이 좁은 지역사회에서 특히 좁고 보수적인 교직사회에서는 그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조심히 윗선의 눈치 보는 게 현명한 거란 뒷말이 공공연히 떠돌았을 때 이거 이거 갱장히 갱장히 문제가 많구먼 하고 느꼈지만 그냥 술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씨부린 당사자에게 "선생님?이게 말인지방구인지?

본인의 부인 역시 출산하고 복직한지 얼마 안되었고 아직 육아기 아기를 키우는 사람이 저런말을 할 때는 그게 그저 개인의 의견인지 그가 애써 대변하는 관리자의 입장인지 모르지만 그냥 그입을 좀 다물어라 하고말았다.


그리고 조용히 양성평등 기본법에 의거해서 재정된 시행령들과 남녀고용평등과 일 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령들을 지속적으로 전체 내부메시지로 돌렸다.

그리고 누가 그에 관해 뭐라 하면 그냥 새침하게 "법과 원칙에 관한 정보입니다" 하고 덧붙였다. 심지어 저 사람 페미물 들은거 아니냐고 담배피며 내 뒷담화를 한다는 어떤 교사에게 "아이고 선생님 세상이 그렇다네요? 저도 이 업무가 힘들어 죽겠어요" 하면서 앓는 소리도 한번 해줬다.

또 비록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도  성인식 개선과 성희롱예방연수는 법정 필수연수란 점을 강조하며 그 연수를 교직원 전체가 이수하도록 지속적으로 푸시했다.


내심 하;;;제발요! AI가 모든 걸 대체하는 미래시대에 결국 인간에게 남는 경쟁력은 다름에 대한 배척이나 혐오가 아니라 받아들임과 이해라고요!!! 그리고 정말 정말 꼰대 같으니까 여자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말을 하고 싶어도 제발 말을 아끼고 자중하시라고요 하고 속으로 외쳤다.



그런데 지난 몇 년의 노력이 쓸모없는 게 아니었는지 정말 인식의 변화가 느껴졌다. 회식 때 가장 약자의 입장에 서 있을지도 모르는 비정규직 젊은 여교사들에게 술을 강요하는 일이 사라졌다.

앗싸 회식이다! 저 구석에서 조용히 열심히 고기나 뜯다가 사라져야지 하며 말없이 냠냠냠 먹고 있는 나에게 기어이 찾아와서는

"내가 느끼기에 이건 성인지 감수성에 어긋나는 사례 같은데? 선생님이 주장하는 그 성인지 감수성을 가지고 판단해 봐요 "하며 자신이 경험했던 썰들을 풀며 나에게 고발?하기 시작했다.


 원로교사 A와 B가(두 분은 남성)  다른 학교로 발령받아 가신 C(이분은 여성) 교사를 오랜만에 만났는데 A가 C를 보고 선생님도 이제 나이 들었나 봐? 왜 이리 이마가  넓어졌어! 하고 외쳤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그걸 들은 B (나에게 고발하신분)는 비분강개하여 친히 와서는  "A는 왜 이리 시대가 바뀐 것도 모르고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느냐? 그게 친근감의 표현이라는데 내 생각은 아니다. 이거  A가 잘못한 거 맞지? " 하고 고발했다. 회식때 이 고기들만 쓸어먹고 얼릉 집에 가서 애들 봐야지 하고 조용히 먹고 있던 나에게 순간 이목이 집중되어서 고기 먹튀를 치밀하게 준비했던 게 실패로 돌아갔지만...

 고발을 시작으로 그 자리에서 여러가지 고발과 민원이 난무하였다. 담배 타임때 타인의 옷차림이나 개인사를 가지고 뒷담을 일삼았다던 그 사람들이 자신은 성인지 감수성이 매우 높은 사람이라며 이런건 이렇게 생각한다고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했다.

고기나 실컷 씹다 빨리 집에 가려던 나는 그 순간 행복했다.


사실 그분 원로교사가 교직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문제라 생각지 못한 문제들을 인식하고 생각하고 그것을 마침내 지적하기까지 그분이 교직에 들어온 지 삼십 년 가까이 된걸 생각하면 삼십년의 시간이 걸린 샘이다.

인식의 변화란 이렇게 어렵지만 어쩌면 순식간에 한 번에 이룰 수도 있구나 싶었다.

내가 한 노력이 헛된 게 아니었구나! 저분이 저런 말을 할지는 생각도 못했어! 기쁘다 기뻐!


더 많은 사람들이 비분강개했으면 좋겠다

예전에는, 가해자가 상대를 존중하지 않고 선을 넘는 말과 행동들을 하는것을 문제 삼지않았다. 그냥 그것에 아파하는 피해자를  예민한 사람 취급해 버리곤 했다. 사실은 피해자의 예민이나 둔감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를 진정으로 존중하지 않은 가해자의 태도와 사고방식의 문제였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시스템은 우리를 지켜준다. 그리고 비록 그것에 반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도 그것을 받아들여 순응할 수 있게 한다.

나는 인식과 제도는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가끔 인식을 바꾸기 힘든 사람들에게는 제도가 앞서도 좋다고 여긴다.


일상 속에 숨어있던 소심한 여성주의자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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