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디 쓴 일상을 살아내는 법
넌 참
생각이 많아 !
그런 말을 어렸을 때부터 참 많이 들었다. 칭찬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생각만 많고 뭐하나 제대로 하는게 없냐는 비난처럼 들렸다. 사실 틀린말도 아니었다. 생각이 바로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미적거리다가 타이밍을 놓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학교나 사회에서 경쟁력이 있기는 어려웠다. 그저 그런 중간 정도의 성적과 재능으로 꾸역꾸역 살아왔고,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개인적 행복도는 상당히 높았던 것 같다. 항상 '생각'이라는 장치를 통해 몰입의 즐거움을 느꼈고, 그 과정에서 나에 대해 삶에 대한 의미를 찾아갈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럼 나는 주로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대부분이 '사람'에 대한 생각이었다.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갈까?', '이 경우에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그런 질문들을 항상 품고 살았다. 굉장히 내향적인 성격이었지만 그런 성향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도 귀를 기울이게 했는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의 비교를 통해 내 생각을 더 잘 들여다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도서관에 가면 심리학이나 철학 코너에서 기웃거렸던 것도 그 이유였다. 물론 심리학 책을 여러권을 읽는다고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모두 읽을 수는 없었다. 다만 다양한 사람들의 심리와 생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줬다. 다양한 사람만큼 다양한 생각이 있고, 모두 다르지만 결국 사람은 비슷하다는 위안도 얻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궁금증은 자연스럽게 내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옮겨갔다. 내가 좋아하는게 무엇인지, 내가 잘하는게 무엇인지, 내가 다른 사람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생각들을 깊이 해보고 정리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이런 시간들이 결국엔 자존감을 높이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자존감이 오르니 자신감도 자연스레 오르고 행복감도 올라갔다.
하지만 내가 한 생각들의 대부분은 실생활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실용'과는 거리가 한참 먼, 심하게 말하면 '쓸데없는 생각들'이었다. 당장 이익도 없고 보여지지도 않는 이런류의 생각들에 사람들은 시큰둥했다. 하지만 그런 무심한 반응들에도 흔들리지 않고 내 생각을 이어갔다. 무모하고 용감했다. 왜 그랬을까? 이 쓸데없어 보이는 짓을 나는 왜 쉽게 그만두지 못했던 걸까? 당장 어떤 보상도 없는데 어떻게 계속 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을까?
(행동은 안하면서) 넌 참
(쓸데없이) 생각이 많아 !
| 쓸데없는 생각의 쓰임
쓸데없는 생각이
가장 쓸모있는 놀이가 되는 역설
사람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창구가 있을 것이다. 다양한 삶의 방식만큼 다양한 취미들이 존재한다.
나는 딱히 꾸준히 하고 있는 일반적인 의미의 취미활동이 없다. 독서나 영화감상이 취미라고 하기엔 좀 민망하다. 그건 일상이니까. 스트레스에 민감한 편은 아니지만 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뒤엔 어떤 생각에 깊이 빠지는 편이다. 주제는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 그 생각을 이렇게 글로 쓰기도하고 독서를 통해 내 생각을 비교하기도 하다보면 몰입의 순간이 지속되고 두세시간이 훌쩍 지난다. 그런 후엔 마치 격한 운동을 마치고 맞는 휴식같은 느낌을 받는다. 취미의 정의를 좀 넓게 내린다면, 내 취미는 이런 생각활동인 것이다. 이 취미의 장점은 별다른 장비가 필요없다는 것이다. 가끔 메모지와 펜을 필요할 때가 있지만 대부분은 오로지 머리 하나면 된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없고,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며, 언제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렇게 간편하고 유용한 취미가 있을까? 이만한 취미를 여태 본적이 없다.
가장 게으른자의 무기
두번째 이유는 내가 정말 천하의 게으른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잠이 많고 매사에 느긋한 편이다. 그래서 신중하고 진중하다는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은 그냥 게을러서다. 상대적이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굼뜨고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분명한 건 어떤 사안을 결정할 때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이다. 왜냐면 한번에 빨리 끝내고 싶은 욕심때문이다. 나처럼 게으른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뭘까? 했던 일을 다시 해야 하거나,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간단하고 쉽게 하려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 '잔머리'라고 하는 요령이 필요하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들은 몸으로 움직이는 일보다는, 미리 짐작해 보고 계획해 보는 것에 익숙한 것일지도 모른다. 최대한 치밀하게 계획해서 허투루 쓰는 에너지가 없어야 하니까. 한번 했던 건 죽어도 절대 다시하기 싫으니까.
남들이 그렇게 봐줄진 의문이지만 사실 나는 생각이 많아서 그렇지, 일단 결정이 나면 단호하고 빠릿빠릿한 편이다. 호랑이는 평소에 힘을 비축했다가 사냥을 할 때만 전력을 다한다고 한다. 이것 저것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들에 신경 쓰는 걸 줄이고 정말 중요한 것들에 온 힘을 다한다는 말이다. 느리다는 핀잔을 받을 때 내가 자주 써 먹는 변명 중 하나이다.
| 쓸모없는 생각하는 쓸모 많은 인간으로
내가 했던 무수히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이 소나기처럼 우루루 쏟아진다. 이걸로 탑을 쌓으면 세계 최고층 빌딩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걸로는 아직 부족하다. 아마 앞으로도 이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들을 쌓는 일은 쉽게 그만 두진 않을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들만큼 등짝을 심하게 얻어 맞는 일이 있더라도 상관없다. 내 유일한 취미고 내 행복의 원천이니까. 다만 이제부터는 '쓸데없는 생각' 보다는 '쓸모있고 알찬 생각'의 비중을 더 늘리려고 노력할 생각이다. 쓸데없는 생각을 과하게 쓸 나이는 지났다. 살아온 날의 타임라인이 살아갈 날 보다 더 길어졌다. 그동안의 헛발질은 할만큼 했으니 좀 더 단단하고 의미있는 생각의 탑을 세우고 싶다.
나이가 들수록 신체가 늙어가는 건 슬프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생각이 늙어 가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냥 손 놓고 있진 않을 생각이다. 쓸데없는 생각이든 하찮은 생각이든 좋으니 끊임없이 생각할 것이다. 생각의 근육이 탄력을 잃지 않게 꾸준히 단련해 갈 것이다. 그렇게 쓸모있는 생각을 많이 하는, 쓸모 많는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