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해야할 것, 피해야할 것
유제품을 먹을 때마다 속이 불편해서 왠만하면 피하는 편이다. 냉장고에 있는 우유를 볼 내마다 빵과 함께 단숨에 먹어 버렸으면 하는 맘은 항상 있지만 그렇지 못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하지만 먹을 때마다 화장실을 달려가면서도 가끔은 고소하고 달큼한 맛의 유혹에 넘어갈 때가 꼭 있다.
알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넘어서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돼지고기 특히 삼겹살도 내 속을 뒤집어 놓는 음식 중에 하나다. 열번 먹으면 절반은 탈이 나는 음식이다. 하지만 불판 위에 지글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 유혹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있을까. 상추쌈을 만들어 크게 한입 베어 물면 그야말로 지방과 단백질 폭탄이 입안에서 터진다. 맛이 없을 수가 없다. 하지만 먹을 때의 행복감에 비해 치러야할 대가는 너무 크다. 이삼일은 그 일 때문에 음식을 조심해야하니까.
반면 생각이나 파 그리고 닭으로 만드는 요리는 나와 잘 맞는다. 먹자 마자 힘이 나고 속이 편하다. 가끔은 눈에 번쩍하고 떠지거나 기분까지 좋아지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래서 힘을 많이 썼거나 힘들 땐 무조건 삼계탕이나 치킨을 먹는다.
이렇게 수십년 동안 다양한 음식들을 먹어 보고서야 나에게 맞는 음식이 뭔지를 확실히 알게됐다. 따로 적어 놓지는 않았지만 내게 맞는 음식 사전이 내 머리 속에 만들어졌다. 이런 사전이 있어 다행이다. 음식을 먹고 일어날 리스크를 예방하고 대비할 수 있으니까.
일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나만에게 맞는 일의 사전을 만들고 내가 쓸 수 있는 단어들을 모으는 일, 지식을 추가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하다. 잘 사용할 수 있고 제대로 쓸 수 있는 일의 단어들로 채운 사전을 만들어 놓으면 시행착오를 크게 줄일 수 있다. 쓸데없는 단어들로 채우는 건 배만 아프게 하는 일이 없게 만든다.
나는 디자이너지만 사실 그리는 일보다 쓰는 일이 편하다. 생각하고 구상하는 일, 계획하는 일이 직접 실행하고 실천하는 일보다 수월하다. 시간을 들여 공들여 그릴 시간에 좀 더 구상하고 생각하는 시간에 힘을 쓰는 게 더 효율적이다.
이 걸 혼자 일하면서 더 잘 알게됐다. 우유나 삽겹살을 먹고 탈이 났을 때 우연히 그랬거니 했던 게 그 횟수가 반복돼서면 내 몸에 맞지 않다는 걸 알게 됐듯이, 혼자 이것저것 다양한 일들을 맛보면서 비로소 내게 맞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해봤자 효율이 안오르고 나에게 어려운 일은 그 걸 잘하는 사람에게 넘기는 게 맞다는 생각을 했다. 대신 그 비용을 상쇄하기 위해 내가 더 잘하는 일을 조금 더 하면 될 일이다.
사실 뭐든 하면 늘기 마련이다. 공부도 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중요한 건 느는 속도다. 자기에게 맞는 일은 훨씬 빠른 속도로 는다. 느는 재미에 실력 또한 급속도로 늘어간다.
그 걸 3년 정도 혼자 일하고 나서 깨닫고 그 때부터 내가 못하는 부분을 외주 파트너에게 넘기고 있다. 결과는 만적스러운 편이다. 비용은 들지만 속이 훨씬 편하다. 안되는 걸 끙끙거리며 잡고 있던 체증이 시원하게 내려간다. 앞으로도 도 적극적으로 나가 못하는 것들을 외주할 생각이다.
지난 4년간 많은 경험을 했지만 사실 아직도 접하지 못한 일의 카테고리들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산업 분야별로 매체별로 나에게 더 맞는 일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나씩 더 경험해 가면서 나만의 일 사전을 계속해서 만들어 갈 것이다. 내 사전에 없는 것들은 다른 사람의 사전의 지혜와 능력을 빌어 해결해 나갈 생각이다.
‘내 사전에 포기란 없다’라고 나폴레옹이 말했지만 내 일 사전에는 포기가 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은 끝까지 쥐고 가더라도 내가 못하는 일, 할 수 있어도 별로 탁월하게 못하는 일이라면, 앞으로도 계속 포기할것이다. 남의 일 사전에 그 목록들을 넘겨 각자의 더 멋진 사전을 만들 수 있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