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객지로 돌며 처자식을 돌보지 않았기에 4명의 자식을 홀로 키워야 했다. 다섯 번째 아이가 들어섰다는 걸 알았을 때 그녀는 절망했다. 아이들을 먹여 살리려면 일을 해야 하는데 출산을 하면 쉽지 않을 테고 입이 하나 늘어나는 것도 큰 부담이었다. 고민 끝에 그녀는 아이를 지우기로 결심했다.
병원에 갈 돈이 없어서 쓰디쓴 간장 한 사발을 마셔 보았다. 소용이 없었다. 야트막한 산에 올라가 몸을 굴러 보았지만 역시 소용이 없었다. 몸을 사리지 않고 일을 하면 유산이 될 것 같아 막노동을 열심히 했다. 하지만 아이는 끈질기게도 붙어 있었고, 나는 그렇게 이 세상에 태어났다.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나의 탄생에 얽힌 비화다.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널 지우려고 별짓을 다했는데 안 낳았으면 어쩔 뻔했니?"라는 말을 종종 하셨다.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고 진짜인걸 알았을 땐 큰 충격이었다. 태어나기 전에는 환영받지 못한 존재였다니! 하지만 엄마의 말에는 "네가 태어나서 천만다행이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다.
우리는 살면서 '그때 그랬더라면 어땠을까?' 라며 과거의 일을 후회도 하고 안심하기도 한다. 신기할 정도로 남편복과 자식복이라고는 없는 엄마에게 나라는 존재마저 없었다면 어땠을까?
3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해 엄마에게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게 했다. 그동안 건강 검진도 빼먹지 않고 철저하게 건강관리를 해왔지만 시골에는 내시경 하는 곳이 없어서 유일하게 해보지 못한 검사였다. 결과는 대장암 3기. 우리 집에 모시면서 수술과 항암 치료를 받았는데 엄마는 오래전에 종종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
"너를 안 낳았으면 어쩔 뻔했니?"
내가 이 세상에 없다면? 아마도 세상은 아무 문제없이 잘 굴러갈 것이다. 하지만 엄마의 세상은 완전히 달랐을 거다. 자식을 인생의 전부로 알고 그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고 키웠는데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나를 제외한 자식 네 명이 모두 대학을 가지 않았고 한 번씩 이혼 경험이 있다. 그 과정에서 엄마의 속을 참 많이도 썩였다.
반면 나는 성실한 모범생에 알아서 공부하고 좋은 직장에 다니다가 능력 있는 남편을 만나 결혼해서 아직까지 잘 살고 있다. 엄마에게는 내가 자랑이며 자부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딜 가나 누구에게든 자식 자랑 타임에서 빠지지 않는 주인공이다. 대장암 수술과 치료 후에는 엄마의 목숨까지 살린 대단한 딸이라는 훈장까지 추가되었다. 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이여!
학창 시절에는 너를 안 낳으면 어쩔 뻔했냐는 말을 들을 때마다 부담되었던 게 사실이다. 동시에 막중한 책임감도 느꼈다. 나에 대한 엄마의 기대가 커서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했는지도 모른다. 언니 오빠들처럼 살지 않을 거라는 몸부림이기도 했다.
나는 친정에만 가면 자만심이 하늘을 찌르곤 했다. 언니 오빠들이 한심하고 답답해 보여 잔소리를 하고 가르치려 드는 것이다. 듣기 싫은 소리, 비판의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불과 몇 년 전에 문득 "너나 잘해!"라는 내적 외침이 들려왔다. 형제들에게 훈계하고 바람직한 삶의 태도를 논할 게 아니라 "나나 잘 살자"라는 깨달음이 찾아온 것이다.
"몰랐어? 우리 막내딸이 작가잖아"
얼마 전, 엄마가 진료를 받기 위해 우리 집에 오셨을 때 고향의 친구분과 통화하는 걸 들었다. 부끄러워서 숨고 싶을 정도로 엄마의 목소리에는 자부심과 자만심이 가득했다.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딸을 최고의 딸로 생각하신다. 그 순간, '어쩌면 나는 엄마의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최고의 작품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낳으면 안 되는 자식에서 목숨을 살린 자랑스러운 자식이 되었기에 이것만으로도 내 존재의 가치와 삶의 의미는 충분하지 않을까? 다행스럽게도 엄마는 다시 건강을 되찾았고 "네 덕분에 살았다"라는 말을 자꾸 하신다.
나는 누구이며 이 세상에 왜 태어났을까?
나라는 존재가 한 사람의 세상에서 유일한 희망이 된다면 기꺼이 모든 역경을 헤치고 멋지게 살아낼 것이다. 또한 다른 누군가에게 필요로 하고 빛이 될 수 있도록 선한 영향력을 맘껏 발휘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와 사명이라면 무겁고 막중하더라도 그 길을 가련다. 넓은 우주에서 나라는 존재는 작고 미약하지만 내가 있고 없고는 큰 차이가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