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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류작가 강은영 Sep 30. 2021

잃어버린 반지, 다시 찾은 진짜 나

스무 살 풋풋한 여대생 시절, 친구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과 펜팔을 시작했다. MZ 세대에게는 생소하겠지만 펜팔(pen pal)이란 편지를 주고받는 친구를 말한다. 나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고 남편은 청주에서 공군사관학교를 다니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편지와 전화를 주고받으며 서로 호감을 키웠고 2개월 만에 직접 만나 연애를 시작했다.  


학생 신분으로서 장거리 연애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밖에 만나지 못했는데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영화를 보러 갔다. 한석규, 전도연 주연의 '접속'이라는 영화였다. 작은 원기둥 통에 든 감자칩을 먹고 있었는데 남자 친구가 들고 있던 과자를 나한테 넘겼다. 과자를 거의 먹을 때쯤, 갑자기 입안에 딱딱한 것이 씹혔다. 놀라서 꺼내어 보는데...... 어라? 웬 반지?



"오빠! 반지가 있어요! 이게 어떻게 여기 들어갔지?" 이상하고 신기해서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영화관 불빛에 반사되어 가운데 박힌 보석이 붉게 빛났다. 순간 장난감 반지인 줄 알고 이로 깨물어 보았는데 아뿔싸! 플라스틱이 아니라 금속이었다. 남자 친구가 귀엽다는 듯이 빤히 쳐다보는 것도 모르고, 깜짝 놀랐다가 이로 깨물었다가 손가락에 껴보았다가 혼자서 호들갑을 떨었다.


"와, 내 손가락에 딱 맞다!" 웃음을 참고 있는 오빠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남자 친구가 준비한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날이 만난 지 백일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고 정말 로맨틱한 남자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접속 반지'로 고백을 받은 나의 심장은 그 남자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후로 그 반지는 내 왼손 약지에 자리를 잡았다. 8년 반의 연애 끝에 결혼을 하고 나서도 결혼반지는 모셔둔 채 '접속 반지'를 착용했다. 죽을 때까지, 아니 죽고 나서도 빼지 않겠다며 반지와 물아일체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처음으로 반지를 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내 생애 첫 수술을 받기 위해서였다. 쌍둥이인 둘째를 응급으로 제왕절개 해야 하는 상황이라 남편이 오기도 전에 수술실로 들어갔다. 쇼핑백에 반지를 비롯한 짐을 넣어두고 병실을 나갔는데 돌아와 보니 쇼팽백이 없어졌다. 그렇게 내 소중한 반지는 사라지고 말았다.


남편은 며칠 동안 반지를 찾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져보고 청소부도 찾아가 보았으나 허사였다. 내 손가락엔 반지 자국만 하얗게 남았다. 똑같은 반지를 사주겠다고 했지만 같을 순 없었다. 우리의 처음과 오랜 연애, 5년이라는 결혼의 추억이 모두 담긴 반지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때의 상실감과 허탈감이란! 


쌍둥이를 낳고 나서는 가슴 아픈 일, 힘든 일을 차례로 겪다 보니 반지가 서서히 기억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접속 반지가 있던 자리에는 어떤 반지도 낄 수 없었다. 그렇게 꼬박 10년을 비어있던 자리에 작년에서야 다른 반지가 자리를 잡았다. 결혼 15주년 기념으로 단둘이 여행 갔을 때 남편이 사준 반지다.



접속 반지가 사라졌던 10년은 내가 잃어버린 10년의 세월과 닮았다. 쌍둥이의 출산과 막내의 죽음, 둘째의 장애라는 사건은 '진짜 나'를 잃게 만들었다. 매사에 열정적이고 긍정적인 강은영, 애교 많고 사랑스럽던 아내, 큰아들밖에 모르는 아들 바보였던 내가 우울하고 부정적인 감정들로 꽉 찬, 남편을 미워하며 큰아들한테 감정풀이를 해대는 괴물처럼 변해 있었다.         


그러다가 작년에 첫 책을 쓰면서 예전의 내 모습, 진짜 나를 점차 찾아갔다. 접속 반지는 끝까지 찾을 수 없었지만 15주년 기념 반지가 대신한 자리에는 더욱 단단해지고 한껏 성장한 내가 있다. 마치 이렇게 될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왼손 약지는 새로운 주인을 만나 더욱 빛을 내는 중이다.  


스무살 찬란했던 시절의 영화와 반지가 이제는 흑백 영화처럼 기억에서 흐릿해졌다. 나는 정말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렸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남편은 여전히 곁에 있고 25년동안 변함없이 사랑받고 있다.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진짜 나도 다시 찾았으니 영영 잃어버린 접속 반지는 아름답고도 시린 추억으로 묻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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