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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류작가 강은영 Jun 23. 2021

시간이 약이 되더라

상처와 기억

11년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시간이 정말로 약이 된다는 사실을.

그때 알려줬다한들 받아들일 수 없었을 터. 상처가 나으려면 곪고 터지고 아무는 나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흉터가 남는다. 마치 머물다 갔다는 증거라도 남기는 듯이. 내 삶의 가장 크고 아픈 상처가 아무는 데는 꼬박 1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긴 시간 동안 아파하고 괴로워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흉터가 아닌 상처로 자리하고 있을 거다.


이틀 전이 둘째의 생일이었다. 오후에 아들이 없는 틈을 타서 케이크와 선물을 사들고 오는데 아파트 공동현관 앞에서 문득, 셋째가 떠올랐다. 생일날에 그토록 늦게 떠오른 적은 처음이라 놀라우면서도 이렇게 잊혀 가나 싶어 씁쓸했다. 한 때는 기를 쓰고 잊어 보려고 노력도 해보았지만 결국엔 시간이 해결해 주나 보다.


가슴에 묻은 아이를 떠올리는 일은 여전히 나를 힘들게 한다. 그런데 점차 그날의 기억과 그때의 일들이 흑백 영화의 장면처럼 흐릿하게 빛깔을 잃어가고 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나도 살아야 하니까 인생 최대의 고통으로부터 무의식적으로 멀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반면 좋은 기억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선명한 색으로 기억에 남는다. 16년 전 신혼여행 때 피지섬 해변에서 한 밤에 춤을 춘 장면은 아직까지 뚜렷한 컬러로 남아 있다. 그날의 습한 공기와 자유롭고 평화로운 분위기까지.    


기억은 누군가의 뇌에 들어가 조작을 거쳐 그 사람만의 추억이 된다. 조작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같은 일을 겪더라도 해마와 편도체의 상호작용에 따라 다르게 기억되기 때문이다.  해마는 기억을 담당하고 편도체는 감정을 담당하는 뇌 부위인데 서로 붙어 있다. 그래서 행복, 기쁨, 공포, 슬픔 등 특별한 감정이 들어간 기억은 더 오래간다. 같은 사건일지라도 감정의 느낌은 사람마다 다르기에 기억은 서로 다른 추억이 되는 것이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주인공 조엘은 헤어진 연인을 잊으려고 고통스러운 기억만 지워 주는 회사를 찾아간다. 머지않아 현실에서도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단 한 가지만 지울 수 있다면, 그때 나는 어떤 기억을 지워야 할까?   

출처: CINE21

상식적으로는 내 인생 최대의 고통을 지우는 게 맞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2010년의 기억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조엘의 기억이 지워질수록 지우고 싶지 않아 했던 것처럼. 시간이 약이 되기도 했지만 아픈 기억을 지운다고 해서 더 행복해지거나 더 잘 살 것 같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제는 흑백이 되어 버린 그날이 떠오르면 떠오른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그냥 살아갈 것이다. 아이를 잃어버린 상처도 고통스러운 기억도 모두 내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상처와 기억을 통해 지금의 나는 이만큼 크고 강한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은가.


해마다 가장 힘든 달은 쌍둥이가 태어났던 6월과 셋째가 떠나간 9월이었다. 그달만 되면 아무것도 손에 안 잡히고 나만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일란성이었기에 둘째만 보면 셋째가 떠오르고 엄마의 사랑을 못 느끼고 일찍 떠나버린 아이가 몸서리치도록 그리웠다.


평생 그리워하다가 말지라도 아이에 대한 기억은 소중히 간직하고 싶다. 이번 생에 못다 한 인연을 어쩌면 다른 생에서는 이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부질없는 소망도 해본다. 어쩌면 지금의 남편, 아이들도 이토록 간절히 사무치고 그리워했던 인연인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렇다면, 사랑만 주기에도 모자라고 아까운 시간들이지 않을까?    


앞으로 10년 후에는 그날의 기억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두 배의 시간이 흐르면 상처의 흉터도 더 많이 옅어질 테니. 하지만 쌍둥이를 임신했을 때의 놀라움과 기쁨, 아이들을 품고 있으면서 행복했던 순간들, 작고 여린 두 생명체를 보았을 때의 신비로움과 장애아인 둘째를 키우면서 겪은 수많은 사건들과 기억은 평생 잊히지 않길 바란다. 한 가지 맛보다는 달면서 짭짤하고 매운 여러 가지 맛을 내는 음식이 더 맛있는 것처럼 내 인생도 시간이 갈수록 더 맛있어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저는 <일류 두뇌>와 <당신의 뇌를 바꿔드립니다> 저자인 일류작가 강은영입니다.

세 번째 책으로 장애아인 둘째 양육 이야기를 쓰고 있어요.

올해 안에 발간하는 것이 목표인데 글이 잘 써지지 않아 편안하게 브런치에 초고를 연재하려고 합니다.

초고니까 자주 수정이 될 것 같아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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