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 대한 평가를 덤덤히 받아들이기
텃세를 극복하는 것 같다가도 텃세에 굴복하는 날들이 반복되던 입사 3개월 즈음..
나를 지금 이 회사에 있게 한(1차 면접관) 이사님이 나를 불렀다.
Probation 기간이 끝나니 으레 하는 형식적인 면담이라고 생각했지만
항암제는 처음 하는 내가 혹시 일하는 방식이 조금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아닐지
아니면 따라잡는 속도가 느리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동시에 지난 3개월 동안 체계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찾아볼 수 없는
정보를 가진 사람이 갑질을 하는 것 같은 묘한 분위기의 회사 속에서
텃세 속에서 한 껏 움츠러든 어깨너머로 눈치를 보며 나름대로 빨리 업무를 습득했다고 생각했기에
혹시 잘하고 있다는 격려의 말을 듣게 되는 것은 아닐지 기대도 되었다.
면담이 시작되고, 평이한 말들이 오고 갔다.
적응하는데 힘든 것은 없는지를 묻는 질문에 그럭저럭 괜찮다는 형식적인 대답.
항암제 경험이 없지만 빠르게 배우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표현에 더 열심히 잘하겠다는 응답.
그리고 이사님은 어렵게 입을 떼셨다.
'음.. 내가 XX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이 말을 전해주는 게 XX의 발전을 위해서 더 좋을 것 같아서'
사람들이, XX를 얼음공주 같다고 말하더라고.
순간 내가 다 얼어붙었다.
얼음.. 공주..?
내 머리는 순간 저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기 위해 바쁘게 돌아갔다.
3개월 동안 나는 회사 사람들에게 내 개인적인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고 할 기회도 없었다.
다들 재택과 사무실 출근을 번갈아 가며 하는 마당에 내 옆자리에는 사람이 있다가도 없다가도 했고
함께 일하는 팀 사람들과는 업무를 파악하고 내 몫을 하기 위해 98%는 일 얘기만 했다.
2%는 의미 없는 날씨 이야기와 인사 정도.
나는 억울했다.
먼저 나를 차갑게 대한 것은 저들이 아닌가?!
'항암제도 안 해본 주제에'라는 눈빛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는 더 많이 빨리 습득해야 했고, 내 나름의 3개월 내에 정복!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나는 매 순간 집중하고 최선을 다했다.
물론 그 모습이 차가워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미팅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레이저가 나올 것 같은 눈으로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일에 집중했고,
입을 떼는 순간은 내가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한 의사소통뿐이었으니까.
그러나 '공주'라는 표현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랄까. 내근직에 여자가 많은 회사에서 '공주'라고 표현했다는 건 '공주병'같다는 얘기 아닐까?
나의 어떤 태도가.. 그렇게 아니꼬왔을까..
억울함을 짓누르고 이사님과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주저리주저리 변명을 늘어놓고 싶었지만, 그걸 좋아할 만한 타입의 사람도 아니었고 핵시만 간결하게 전달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이사님은 남자분이었다)
빠른 시간 내에 적응을 잘해보려 하니 너무 업무에만 집중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앞으로는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가려고 노력하겠다.
그리고 서두에
이런 얘기를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지금도 감사하다.
억울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는 나를 정말 생각하고 내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관심에 그 얘기를 본인도 어렵게 꺼냈을 것이다.
나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면,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그와는 상관없는 일일 수 있지 않은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이사님도 2년 전 이 회사에 이직했고 텃세로 많이 힘드셨다고 한다.
그리고 본인은 외로운 늑대라고 불렸다고 하는데...
여기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을 별명 지어주는 관습? 같은 게 있는 걸까...
내가 얼음공주라는 이미지를 깨는데 얼마만큼의 시간과 얼마큼의 노력이 필요한지 알 수 없었지만
그날 이후로 이건 일을 하면서 계속해서 내가 가져가야 하는 숙제 같은 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