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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릴리 Sep 22. 2024

기생심리


1.

양복점을 접고 난 뒤부터 아버지는

들어간 회사들을 오래 다니지 못하고

출장 맞춤복도 하는 둥 마는 둥

점점 일을 안 하고

안 하다가

쉬었다


낮부터 새벽 늦게까지 티비를 켜놓고

낄낄낄 깔깔깔

단칸방에서 물개 같은 박수를 쳐댔다

엄마와 내가 깜짝 놀라 자다 깨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침이 되면 혼자 누워 잠들었고

밤새 노느라 힘이 들었는지

몸살 앓듯 자주 끙끙거렸다

엄마는 일하러 나가고

나는 학교에 갔다


친할머니가 온 어느 날

아버지가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

엄마를 불러 따끔한 목소리로

다른 집 기집들은 돈도 잘 벌어온다더라며

이불을 고쳐 덮어줬다

아버지는 자는지 깨어있는지 모를 기침만 해댔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버지가 집에 있지 않을까

마음 졸이며 현관문을 열었다

역시나 아버지는 집에 있고

나는 다시 집밖으로 나섰다


2.

아버지가 늦은 출근 준비를 한다

씻고

머리를 말리고

화장품을 바르고

찌개를 다 태우고

밥을 먹는다

담배를 피우고

옷을 입고

내 방문을 연다


자는 척을 하면

한숨소리와 함께 문이 닫힌다

출근 배웅도 해봤지만

자는 척이 편하다


어느 날 저녁

벌써 몇 달째 노는 아들을 불러

언제까지 놀 거냐 돈을 벌어야지

나이가 곧 마흔인데

결혼은커녕 홀몸 간수도 못하는

너는 인생 실패자다

나가서 노가다라도 해라 하는데

싫다는 아들이 한심하고

그럼 뭘 할 거냐는 말에

하고 싶은 일을 찾을 때까지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해보지만

니 나이가 몇인데

고성이 오가고

아버지는 한 번도 나에게

이불 덮어준 적이 없다는 사실이

서러워 울고

며칠 뒤 집을 나간다


3.

생활비 준다는 핑계로

설거지를 안 한다

빨래도 안 하고

청소 한 번을 안 한다

말은 쌀쌀맞고

무시하고 깔보고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마음에 안 드는 건 죽어도 안 한다


본인이 언제나 우선이고

본인만 배부르면 그만이고

식구들 음식 한 번을 사 온 적이 없고

밥 한 번을 혼자 차려먹지 않는다

김장 한 번을 안 도와주고

무거운 거 한 번을 안 들어주고

폐가 약한 엄마가 있는데도

집에서 담배를 피우며

꿀이며 과자며 질질 흘려가며

온통 어지럽히고 다닌다


도박을 다시 하러 다니고

그런 아버지를 보며

한숨 쉬는 엄마

티비보며 낄낄거리는 아버지

집으로 드는 햇살이 시들어간다


4.

기생이 길어지면

원망조차 시든다고 하는데

싸움이 끊기고 대화가 끊긴 가족에게

쇠사슬 같은 고리는 짐일 뿐


어느덧 서로에게 기생했던 계절은 끝나가고

세사람의 양복점은

홀로서기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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