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영국 여행 프롤로그
여행 후에도 달라질게 없다는 걸 나는 알아
2015년 12월 말 '런던 항공권' 검색하는 것이 출근길 일상이던 나날이다. 일정을 입력하면 '잠시 기다리시오'라는 메시지와 함께 비행기 그림이 손 안의 하늘을 가로지르며 항적운을 남겼다. 잠시 감상에 젖다보면 항공기 가격이 쭉 나열되었는데, 무심코 통장 잔고를 비교하는 나를 발견하곤 놀랄 때가 있었다. 덕분에 나의 뇌가 램수면 상태일땐 검지 손끝까지 내려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며칠이 지나도 결정을 유보하자, N포털은 여행 팸플릿 같은 빅벤(Big ben) 사진 한 장을 슬며시 건넸다. 반짝이는 황금빛 드레스를 차려입고 템스강변에서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 같았다. 마침 7호선 차창 밖으로, 시린 한강에 잘개 부서진 아침햇살이 고양이마냥 눈썹을 간질이며 교태 부리고 있었다.
며칠 후 친한 친구들과 송년회 겸 자리를 가졌다. 그리곤 '영국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말을 결혼 발표처럼 선포했다. 여전히 항공권 예매 화면만 불상 머리처럼 문지르던 중이었지만, 고양이 애교 같은 햇살에 녹아내린 날 서점에 들러 마음을 굳힌 것이다.
여행을 하루 앞둔 저녁, 친구들 중 한 명으로부터 "많은 것을 느끼고 돌아오십쇼"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직장인 늦기 전에 여행 떠나라'와 같은 뻔한 제목을 접한 기분이었다. 별다른 답변은 하지 않았으나, 캐리어에 붙인 스티커마냥 여행 내내 따라다닌 것을 보면 큰 책임감을 느꼈나 보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여행 후에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새로운 경험과 시각이 삶의 자양분이 될 순 있겠지만, 근본적인 삶이 변하진 않는다는 것을. 심지어 누구나 한 번쯤 비포 시리즈와 같은 로맨스를 꿈꾸지만, 실제론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보다 걷기를 좋아하는 나는, 오른쪽 발뒤꿈치와 왼쪽 새끼발가락 물집 때문에 아침마다 밴드를 붙여야만 할 것이며, 대중교통을 잘못 타서 헤매기 일쑤일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떠나는 이유는
낯설고 조용한 곳 또는 낯설어서 조용한 곳이 필요했기 때문
많은 여행에 대한 기대와 현실 사이의 염세적인 것들을 뒤로하고, 떠나려는 이유는 '낯설고 조용한 곳 또는 낯설어서 조용한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항상 목적을 명확히 밝히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것을 느끼고 돌아오십쇼'에 대한 함축적인 답변이다.
후보군 중 영국이었던 이유는 한때 대영제국(Great Britain)의 의미를 찾고자 역사도 공부하였고, 관련 문화에 심취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러브 액추얼리 중 대사 한 줄 때문이었다.
"영국은 작지만 위대한 나라입니다. 셰익스피어, 처칠, 비틀즈, 숀 코네리, 해리 포터도 있고, 데이비드 베컴의 오른발 아니 왼발도 있지요"
누구에게나 그런 문장이 하나쯤은 있다. 그리고 때로 지극히 단순한 이유 때문에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나에겐 러브 액추얼리의 한 줄이면 설레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섞이지 않는 열정과 냉정을 동시에 품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본 글은 2016년 1월의 여행기로, 발행일과는 시간과 계절 상의 차이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