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외국의 것들이 달리 보이는건
요란한 캐리어를 내려놓은 것만으로도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시차 적응에 실패하고 푹 꺼진 소파처럼 무거운 아침이다. 아직 밖은 은밀하고 밤새 켜둔 TV탓에 머릿속엔 벌 한 마리가 붕붕 휘저어 놓았다. 그러나 소파 엉덩이 자국처럼 영원의 시간이 나에겐 없었다. 그래 시간 때문이었다. 스탠드 전등을 켜고 비행 티켓을 확인해보니, 굵은 글씨체로 단호히 쓰여 있는 런던발 오후 5시.
그 사감 같은 글씨체에게 잔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3시 반까지 공항에 도착해야 할 것이다. 그 생각에 이르자 머릿속 벌들이 사라지고, 나는 간밤에 대충 풀어놓은 짐을 보따리 장사꾼처럼 싸기 시작했다.
로비에 내려가 이른 체크아웃을 부탁하자, 미소를 띤 직원이 '잠자리는 어땠는지, 불편한 점은 없었는지' 사무적인 이야기를 사무적이지 않게 묻는다. 나는 미소로 이에 응답하면서 '혹시 괜찮다면, 짐을 여기에 맡기고 오후에 찾으러 와도 괜찮을지' 물어보았다. 양쪽 입꼬리를 최대한 올려 'Please'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이죠'라는 기대했던 답변과 보관증을 건네받고 힘껏 문을 나섰다. 그 만물상 트럭 같은 캐리어와 요란한 소리를 두고 온 것만으로도, 무거운 공기가 차가운 코끝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단순히 외국의 것들이 새롭거나 좋은 게 아니라
정체성을 잃은 우리의 것들에서 느껴지는 허전함 때문이다
어째서 외국의 자갈 보도블록이며, 다닥다닥 성냥갑 같은 건축물 조차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바깥 외(外)에서 연상되는 우주의 무한함, 또는 Foreign이라는 윗니와 아랫입술의 낯선 입맞춤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순히 심리적인 요소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터무니없이 느껴지는 것들에서도 그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와 나를 압도하는 가치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자갈 보도에서 그 아래 태아처럼 숨 쉬는 토지에 대한 배려와, 건축물에선 공간의 낭비 없이 치밀한 어느 마이스터의 망치질 소리를 들었다.
어느 평론가가 '이제는 Why나 How가 아닌 What (한국인은 누구인가)을 생각해볼 시점'이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의 것들을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검은 폐허 위에 새하얀 바벨탑을 세우는 과정에서 우리의 가치관과 정체성이 쏙 빠진 것은 아닌지, 단거리 경주에만 치우쳐 근시안이 되고 만 것은 아닌지 말이다. 즉 단순히 외국의 것들이 새롭거나 좋아 보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텅 빈 바벨탑에서 느껴지는 새하얀 공허함 때문이었다.
새하얀 상념이 겨울 입김처럼 희미해지자 깜깜한 내 두 호수 안으로 아침햇살을 받은 파스텔톤 건물, 서로 부축하며 길을 건너는 노부부, 뢰머광장에 웃음을 채우는 성가대 어린이들이 한 줄기 초록색 불 밝힌다. 그 생명과 동시에 독을 상징하는 초록 앞에서, 내 마음은 썩은 사과처럼 아려온다.
본 글은 2016년 1월의 여행기로, 발행일과는 시간과 계절 상의 차이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