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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음 Mar 25. 2016

여행 소감을 말하지 않는 이유

외국 여행과 외국 일상의 차이점

뢰머광장(Roemer square)근처 노면전차



여행 소감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손수 만든 팸플릿을 선뜻 건네기 망설여진다


여행을 마칠 즈음이면 특정 심상이 남기 마련이다. '기후는 온화했고, 사람들은 친절했으며, 성은 웅장했다' 등 일련의 것들은 여행사에 팸플릿이 된다. 잘 각색된 편집물은, 예상외로 오랫동안 각인되고 확대 해석되기도 한다. 때문에 여행 소감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섣불리 팸플릿을 건네기 망설여진다.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이 100년 후 콜럼버스에게 '동양이란 금과 향신료의 나라'라는 편견을 심어준 것처럼, 이를 경계하기 때문이다.


나는 두 가지의 상반된 경험 덕분에 한 손엔 저울을, 다른 손엔 칼을 쥐게 되었다. 하나는 2010년 일본 오사카 여행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듬해 1년간의 유학 생활이다.


2010년의 팸플릿 제목은 '살고 싶은 오사카 : 질서 정연하고, 친절합니다'였다. 횡단보도에선 반드시 좌측통행을 엄수하고, 병목구간에서는 암묵적인 순서가 있다. 사람들은 일에 자부심이 있고, 가정 로봇처럼 친절하다. 모든 것이 빈틈없이 제 역할을 수행하는 세포의 군집 같았다. 일본에는 신호등마다 최면에 빠져들 법한 신호음이 울리는데, 국민들을 통제하는 수단이 아닌가 내내 의심스러웠다.



프랑크푸르트 대성당(Frankfurt Cathedral) 단면
뢰머광장(Roemer square)근처 건물


이국적인 곳의 여행과 일상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이듬해 유학생이 된 나는 팸플릿의 일부 오류를 깨닫고 수정했다. '여행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 삶이 팍팍하고, 차별도 있습니다. 좋은 사람도 많지만, 별로인 사람도 가끔 있습니다'로 말이다.


우선 이방인의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더 많은 짐을 노새처럼 등에 실어야 했다. 의료서비스를 누리기 위해선 보험에 가입해야 하고, 휴대폰 요금도 꼬박꼬박 납부해야 했다. 심지어 신호음을 오래 듣다 보니, 어느 순간 좌측통행도 엄수하고 있었다. 그 소리는 '빅 브라더스'가 만든 것이 분명하다.


심지어 게토 지구에 격리되진 않았지만, 암묵적인 차별도 종종 있었다. 외국인 등록증을 만들기 위해 관청에 방문했을 때의 일이었다. 대기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렸지만, 짐짝처럼 차례가 하나 둘 밀려나는 것이다. 입을 굳게 다문 공무원을 대신하여, 대기화면 속 숫자가 나에게 속삭였다. '너희가 앞으로 우리의 기회를 앗아갈 테니, 이 정도의 차별은 별거 아니지?'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방인의 외진 창가에도 볕은 들었다. 언어를 꽤 구사한다는 점은 구성원으로 인정받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고, 인간관계도 넓어졌기 때문이다. 관계가 촘촘해지다 보니, 시각도 그것을 따라가는 모양이다. 여행객의 눈엔 그들이 하나의 군집 같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포들도 가지각색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하루도 채 안된 '독일 편 팸플릿'을 누군가에게 건네기 쭈뼛쭈뼛 부끄럽다. 다만 나 언제 또 마인강을 거닐며, 괴테처럼 사색에 잠겨볼 수 있을지, 그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본 글은 2016년 1월의 여행기로, 발행일과는 시간과 계절 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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