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밝음 Mar 22. 2016

그날 밤, 소소한 심상들

독일의 첫째 날 밤은, 비운 잔처럼 노란빛 잃고 깜깜하게 깊어져 간다

Frankfurt의 상공에서 바라본 모습
Frankfurt의 Galluswarte station에서 바라본 모습



첫 번째 상황.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착륙을 준비하며, 비행고도가 낮아지기 시작했다. 로컬 타임은 오후 6시라는 것과 또 함께하길 희망한다는 아쉬움의 방송이 들린다. 밤이 되어 깨어난 박쥐처럼 승객들은 연쇄적으로 하품을 하고, 날갯짓 같은 기지개를 켜며 떠날 준비를 한다. 밖에는 퇴근길 차량들이 그려놓은 빨갛고 주황빛 빗방울이 창가에 부딪치고, 그 봄비 같은 소리에 무뎌졌던 감각들도 개구리처럼 깨어난다. 활주로에 가까워지자 양 옆 Lufthansa 여객기들이 카 퍼레이드에 동원된 어린 학생들처럼 방문을 환영하고 있다.


업무 때문에 왔다는 옆자리 승객과는 행운을 빌며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수하물을 찾고 공항 검색대의 마지막 절차를 마치자, 익숙한 것들과 작별하고 혼자가 되었다. 이 낯선 행성에서 'Danke(고맙습니다)'를 제외한 모든 소리는 독서에 적합한 백색소음이고, 내 두개의 암막에 비친 문자는 의미 잃은 상형문자가 되었다. Danke ! 완벽했다. 한편으론 나의 감각들이 묘한 흥분과 노란 뜨거움에, 전구처럼 터져버릴까 봐 걱정스럽기도 했다.


첫 어려움은 Galluswarte station 역으로 가기 위해 표를 구입할 때 발생했다. 발권기의 언어를 영문으로 바꾸고 사탕 자판기 앞 착한 아이처럼 순서에 따랐지만, 구글 지도에서 본 그 역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정확한 발음조차 내 혀끝에 달라붙지 않는 이 문자가 지구 상에 존재하는지 조차 의심스러웠다. 결국 내 뒤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은발의 독일 아저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친절하게 발음까지 알려주셨지만, 처음 단소의 소리를 낼 때처럼 콧등이 피곤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G로 시작하는, 동양화 속 구름처럼 생긴 그 역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Frankfurt 호텔 방에서 창밖을 바라본 모습



두 번째 상황.


'G구름'이라 이름 붙인 역을 빠져나온 고요한 동네 보행로엔 자갈이 지그재그로 깔려 있었다. 비가 씻겨내고 간 동네는 기대했던 깔끔한 독일의 이미지 그대로이고, 강가의 비릿한 자갈 냄새 같은 게 난다. 캐리어의 네 바퀴가 마차처럼 고요를 가르고 지나가니, 비행운 같은 소리가 꼬리처럼 길게 늘어진다. 누군가의 단란한 저녁을 방해하는 것 같아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든다.


약 10분 정도를 더 걸어 호텔 로비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어느 로비에서나 흔한 인테리어 같은 일상이 있었다. 두 남성은 대각선에 앉아 맥주를 들이키려던 참이고, 이제 막 체크인을 마친 여성이 엘리베이터로 향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흰색의 깔끔한 인테리어와 벽지, 그리고 나와 비슷한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여직원 덕분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가방에서 인쇄해간 Voucher를 제시하고, 여권번호와 몇 가지를 기재하였다. 추가적으로 방에서 와이파이를 쓸 수 있는지, 체크아웃 시간 등 기본적인 사항을 확인한 후에 나도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짐을 대충 내려놓고, 젖은 솜이불 같은 육체를 침대에 던졌다. 그리고 쾽해진 눈을 깊이 감았다가 다시 뜨기를 반복했다. 찬찬히 고개를 돌려 콘센트는 몇 개인지 - 전자기기가 많은 내 여행에서 콘센트의 개수는 중요 사항으로, 숙소 예약과 동시에 전화를 걸어 확인까지 한다 - 드라이기는 별도로 있는지 등 체크하였는데, 수식어를 잔뜩 붙여주고 싶을 정도로 기대 이상이었다.



Frankfurt의 Roemer square(뢰머광장)
Frankfurt의 사과와인(아펠바인: Apfelwein)



세 번째 상황.


기내 영화에 반사된 불빛에 오랜 시간 반딧불이처럼 밝힌 얼굴 탓인지, 피곤함이 밀려왔다. 아니 이 피로는 밤샌 뒤 오히려 잠들기 어려운 각성효과 같은 것이었다. 그 약에 취한 듯 몽유병 환자처럼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곤, 낯선 행성에 첫발을 내디뎠다.


미지의 행성에서 유일하게 아는 장소라곤 '뢰머광장(Roemer square)'가 전부였다. 구글 지도로 검색해보니 소요시간 약 29분이라, 이 저녁에 잠시 산책하기에 적당한 거리였다. 조금 걷다 보니 외진 길이 많았고, 길을 물어볼 사람도 없는 망망대해에서 제대로 가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때마침 맞은편에서 철조망을 넘고 있는 10대 청소년 몇 명이 보인다. 그러나 내 안의 스파이더맨 센서 같은 것이 그들에게 말을 거느니 호텔로 돌아가는 편이 낫겠다며 충고를 한다.


새삼 한국인들이 늦게까지 잠들지 않다는 점과 안전한 치안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왜 여행 안내책에서 '밤늦게 유럽에서 부득이하게 외진 곳을 지날 경우, 택시를 타라'고 주의를 줬는지 고개가 끄덕여지며, 그 문장을 쓴 누군가에게 고마워진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영국 드라마 Luther 속 살해 장면에 이를 즈음, 맞은편 흰색 택시에 손을 흔들었다.


'독일은 택시가 벤츠라니..' 잠시 감탄하며, 유턴해서 내 앞에 선 차량 앞좌석에 올라탔다. 밤늦은 시간에 혼자 뢰머광장에 가는 나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는 기사 아저씨의 표정이었지만, 낯선 바깥 풍경에 룰루랄라 신이 났다. 무뚝뚝한 전형적인 독일 아저씨께 몇 가지를 묻고 답하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하여 12유로를 지불하고 내렸다.



네 번째 상황.


일본 유학 때 느낀 점이지만, 독일 또한 늦은 저녁까지 불 켜진 우리나라와 차이가 있었다. 몇몇 술집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는 거리에 다소 심심하였으나, 건축양식에 감탄하며 조금 더 거리를 거닐었다. Jamie's라는 가게를 발견하곤 Classic chicken sandwich로 간단히 식사를 하였으나, 무언가 부족함이 느껴져 근처 술집에 들어갔다.


그곳엔 노란 조명 아래 네 명의 남자가 둥그렇게 서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꽤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두 명의 여성 점원이 있었는데, 한 명은 홀에서 주문을 받았고 다른 한 명은 TV 속 Adele의 Hello 뮤직비디오를 따라 노래 부르고 있었다.


홀에 있는 점원에게 사과 맥주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인터넷 어디에서 프랑크푸르트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사과 맥주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점원은 사과 맥주는 없고, 내가 찾고 있는 것은 분명 사과 와인이고 이름은 아펠바인(Apfelweit)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녀를 믿고 주문한 그 와인은 어디에선가 맛본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은 나질 않는다. 누군가는 사과식초 맛이 난다고도 하고 인터넷 상에서 갑론을박이 펼쳐졌는데, 쌉싸름한 맛을 즐기는 나로선, 그 떨떠름한 맛도 나쁘진 않았다. 한 모금 더 입에 갖다 대봤더니 언젠가 마트에서 샀던 저알콜 와인 중 하나가 떠오른다. 그렇게 노란 잔을 비우고 나니 여행 첫째 날 밤도 그 잔처럼 노란빛 잃고 깜깜하게 깊어져 갔다.


본 글은 2016년 1월의 여행기로, 발행일과는 시간과 계절 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작은 사건들이 만드는 나만의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