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윈서 Oct 25. 2020

잃어버린 '나'를 찾습니다.

찾아주시는 분께는 소정의 '감사'를 드립니다.


맏이에 내향적인 성격인 내가 자기주장을 하는 때는 생선가시를 삼키지 않고 뱉을 때뿐이다.  한번 들어간 커피숍에서 내가 먼저 일어나는 일이 거의 없고, 식사 메뉴를 고를 때도 항상 "네가 먹고 싶은 것"이 먼저이다.  어쩌다가 "오늘 김치찌개 어떨까?"라고 제안하기도 하지만 어제 먹었다며 중식을 먹자고 해도 나의 대답은 간단하다.  "그러자"  물론 내가 어제 중식을 먹었어도 대답은 같다.  "또 먹으면 되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의 생각, 즉 내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럼에도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게 말하고 나는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므로 OK 사인을 보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인이 "집에 맛있는 초콜릿이 선물로 들어왔는데 좋아하면 가져다줄까"라고 물으면 나는 웃는다.

또 어떤 이가 "며칠 전에 미국에 살고 있는 조카가 한국에 들어왔는데 소개해 줄 테니 영어 공부하면서 둘이 친구해 볼래?"라고 물으면 나는 웃는다.

이렇게 호불호를 내게 물으면 나는 웃음으로 대답하고 그 웃음의 의미는 <네, 감사합니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고,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의견을 말해야 알지, 싫다는 뜻이야?"

당황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거절한 일이 없었는데 늘 뭔가 해주겠다고 말한 사람들은 빈손으로 나타났었다.  혼자서 맘이 상해도 물어보지 않았다.  '사정이 있겠지 아마 초콜릿을 다 먹어버렸을 거야. 혹은 미국 조카가 한국에서 바쁜가 봐'  정도로 생각하고 그들에게 두 번을 묻지 않았다. 

부담되는 사람이 되기 싫었으니까.




반면에 나의 마음과 시선 모두를 바깥으로만 보냈다.  "내가 이렇게 하라고, 이걸 먹으라고 했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아?  의사 선생님이 알려준 대로 해야 하잖아..... 학교는 어떻게 다니는 거야, 필요하고 고민되는 것이 있으면 언제라도 나에게 연락해.  너를 위해서는 24시간 전화기가 열려있어."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한 번도 먼저 연락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전화를 기다리다 지쳐서 내가 찾아갔다.  "이렇게 오랫동안 연락이 없으면 잘 있는 거지?  공부는 잘하고 있는 거지? 약은 잘 먹는 거지? 회사생활은? 연애는?  마지막으로 나는 너를 위해 24시간 전화기를 열어두고 있어.  잊지 마 나는 언제나 네 편이야."


이렇게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지인들에게 지치지 않고 내 마음을 물어다 주었다. 

사실 질문에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상대의 변화를 감지하고 그들의 욕구를 알아차려야 한다.  거의 본능적으로 질문거리를 파악하고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지 생각하며 내어놓는 나의 마음이다.  

결과는 항상 과유불급, 그 수많은 질문은 대답이 되어 돌아오지 않았다.  때로는 나의 마음이 방향을 잃고 구부러지기도 했다.  그들에게 나의 존재는 호주머니 속 짤랑거리는 동전이었다.




영리한 사람은 한 번만 말해도 알아듣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들이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가 듣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이미 나이가 아주 많은 어린아이가 되어있었다.  그들은 내게, 조용히 <이제 그만 되었습니다>라고 웃어 보였던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웃음은 내가 보낸 웃음과는 정 반대 의미였는데 이제는 그만 질문들을 내려놓으려던 참에 불현듯 그들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최근의 일이다.

관절염이 심한 엄마는 걷는 걸 무척 좋아하신다.  공원으로 호수가로 재래시장으로 하루 종일 돌아다니는 것도 모자라 감자며 배추며 세일만 보면 잔뜩 사서 수레에 끌고 다니신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두 다리에 쥐가 나고 엉덩이가 아프고 허리가 결려서 제대로 누워있는 것조차 힘들어하신다.  이런 경우 근육통 약을 먹어야 하는데 신장이 좋지 않아 병원에서는 먹지 못하도록 당부하고 있다.  당연히 내 질문은 "얼마나 걸어 다닌 거야?, 택시를 타지 않고 무거운 짐을 끌고 다닌 거야?, 다리 아프다면서 왜 그래?"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표정이 일순 바뀌며 일갈하는 엄마의 대답은 "넌 왜 날 자꾸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거야? 왜 묶어두려고 하는 거냐고?"였다.  "다음에는 조심해서 다닐게, 나도 알고 있으니 걱정 말어."라는 대답을 기대하고 있던 나는 당황스러웠다.  "내가 왜 엄마를 묶어두려고 하겠어, 그게 아니잖아."라고 대꾸했지만 이런 류의 대화가 늘 그렇듯이 그만 감정이 상하고 말았다. 


아마 질문이 잘못되었거나 말할 때 내 표정이 엄마를 불편하게 했을 수 있겠다.  엄마는 다리가 아픈 것보다 집에 있는 것이 훨씬 더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또는 나의 관심이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감당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많이 걸어 다니겠지.  내가 쓸데없는 과민반응을 보인 거야.  새삼스레 나를 자책하다 보니 마음이 움츠려 들었다.


기회는 찾아왔다.  엄마와의 대화가 어긋나고 보니 그동안 다른 사람들과 나눈 잘못된 대화가 일순간에 쏟아졌다.  그랬구나, 내가 너무 그들에게 초근접해서 들여다봤구나.  그리고 후회가 되었다.  그것도 모르고 대화 끝에는 어깨가 처지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을 탓했던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전화를 24시간 열어놓으래?  나는 그게 부담스럽다고, 제발 관심을 거둬죠.'  비로소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 내 잘못이다.> 어쩌면 나를 탐구하는 게으름을 그들에게 보내는 관심으로 면책하려고 했던 것 같다.


<피카소 / 좌측 : 우는 여인 - 우측 : 거울 앞의 여인>



비로소 내 안에 내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늦었지만 모든 질문들을 나에게로 돌려놓아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작가의 이전글 내가 브런치 작가가 되다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