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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윈서 Aug 09. 2020

떨, 똘, 덜  

영어공부는 재미있어!

인터넷을 이리저리 뒤지다가 시계를 보니 밤 11시가 넘었다.  오늘은 그만 정리하고 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주변을 정리하는데 밖에서 희미하게 무슨 소리가 들린다. 무슨 소리지? 가만히 귀를 기울이다 순간적으로 빵 하고 웃음이 터져버렸다.  

"떨, 똘, 덜, 뒬...."  

인형을 뜻하는 영어 Doll를 열심히 소리 내어 읽고 있는 엄마의 목소리였다.

'아! 엄마, 아하하하하 '

영어 학습지를 시작한 엄마가 TV 볼륨을 작게 한 채 공부를 하는 중인가 보다. 현재 단계는 알파벳 익히기,

Doll은 D로 시작하는 단어이다. 핸드폰에 영어사전 앱을 깔아드렸더니 해당 단어를 반복 재생하여 듣고 

계신 것이다.

 "에그, 엑그, 계란, 페이스 페이스 얼굴, 그리이인 

그리이인 녹색..."

단어 하나하나를 전부 검색 중인데, 

이번 주는 Music의 M까지 익히는 단계이다.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와 엄마를 보니 더 웃음이 난다. 돋보기를 썼지만 눈은 학습지와 가까이서 교재 중이시다.  한 손으로는 영어사전 앱을 켜고 해당 단어 옆에 보이는  <스피커> 모양의 이모티콘을 누르고 계신다.

어머 저 자세, 혼자 보기 아까워서 뒤에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엄마 그렇게 재미있어?"

"아니, 할 일이 없잖아.  심심해서 하는 거야."

"아, 심심해서어...  나 자요 ~"

"잘 자~"

그로부터 한동안 다시 "애쁠 앳쁠 애플, 부르 부르 불르, 커푸 컵프, 커업 .... "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학습지 선생님이 방문하는 월요일은 아침부터 몸과 마음을 다듬고 잔뜩 기대에 찬 모습으로 지내신다. 

우선 1주일 동안 공부한 학습지는 가지런히 두고 선생님과 마주 앉을 책상은 닦는다. 필통 점검은 필수이다. 

입이 터질 만큼 꽉 찬 필통에서 필요한 것들을 빼내 책과 가지런히 해 놓고 선생님이 오실 때까지는 다른

볼펜을 잡으신다. 

기분 탓인가, 그날은 엄마의 말투와 모습도 정돈된 모습으로 바뀌는데 내색은 안 하지만 가만히 구경하는

나는 은근히 재미있다.

선생님은 밤 9시가 넘어서 방문하시는데 우리 집에 마지막 집이라고 하신다. 요즘은 저 출산으로 아이들이 

줄어 들고 있는데, 반면에 중년. 노년 층들이 자기 계발을 위해 모자라는 회원수를 어느 정도 채워주는 

추세라고 하신다.  그렇다고 회원가입 빈도가 눈에 띄게 늘겠는가.  지역편차도 있을 것이고 교육이 반드시 

필요한 아이들 세대와는 다르니 말이다. 


호호호호


"어머니, 정말 열심히 하셨네요.  참 잘하셨어요. 호호호"

"아유 뭘요, 글씨도 빼뚤거리고 창피해요."

"아니에요, 정말 잘하세요.  자, 받아쓰기 한번 해볼까요?"

"A, B, C, D, E, F, G ... "

삐뚤빼뚤 하지만 제법 잘 쓰시는지 내친김에 Z까지 써보라고 하신다.

다행히 몇 년 전 알파벳 공부를 잠시 하셨던 경험이 있어서 무리없이 잘 쓰셨다.

"어마, 정말 잘하셨어요. 아휴, 진도가 빠르세요."

연필을 손에 꼭 쥐고 노트 한 귀퉁이에 빼곡히 적어놓은 알파벳이 꼬불꼬불 질서 없이 적혀 있다.


"엄마, 선생님 있으니까 좋아요?

"어, 나 국민학교 3학년 때 선생님한테 잘 보이려고 손등을 비비고 막 그랬어."

다시 연습장 위에 Music를 써 내려간다. 

"무유우직, 뮤우지익"

"다음 주에 또 오시니까 연습 많이 하세요."

"그래야지."

엄마의 열의는 앵글로섹슨족도 감탄할 만큼 엄청나다.  양 미간에 세로줄이 세 개나 깊이 파이고 두 눈은 안경

너머로 레이저를 쏘고 계신다.  얏, 단어야 너 게 섰거라!

아무래도 책 읽는 스타일을 보니 내가 엄마랑 닮은 것 같다. 책에 있는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물체인 책을 

뚫어 버리겠다는 결의로 글자가 있는 그 지점에 집중력을 발휘해서 반복적으로 노려본다. 

우리는 주로 책이나 TV를 구멍 내는데 관심이 많은가 보다.

"엄마, 눈 좀 푸시지? 너무 심각해요"

"어? 그래?  하하하"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지입~쭝

어머, 이러다가 우리 집에 영어 천재 나오겠다아, 나는 엄마 놀리는 재미에 빠져버렸다. 

오늘 밤도 이렇게 아쉬운 하루가 지나간다.




자식 입장에서 노부모가 밤늦게 돋보기를 쓰고 공부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큰 행운이다.

그만큼 당신의 노년 시기를 슬기롭고 긍정적으로 보내고 계시다는 뜻이니까.

전에는 TV를 보거나 핸드폰 주소록을 검색하면서 혹은 옛 사진을 넘기시다가도 공허한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자신이 노인임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우울감이 오기도 

한다는데 의욕을 잃고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며 쓸쓸해하는 엄마를 보면서 걱정이 되기도 했었다. 

유명한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인간이 죽음을 받아들이는데 부인,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의

단계를 거친다고 말했다.  물리적으로 죽음에 가까이 있는 노인이 된다는 것, 자신의 소멸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은 두려움을 느끼기에 충분할 것이다. 

당신의 어린 시절, 너무 가난해서 그것이 가난 인지도 모르고 지내온 시절, 뒷집 아이 영철이와 앞집 순이도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같이 물깃고 빨래하고 청소하며 살았기에 세상살이는 다 그런가 보다 하셨다고 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공부 많이 하고 잘 사는 사람들을 보면 다른 세계 사람들이라 부럽다는 엄두도 못 냈다고 

얘기하셨다.  그렇게만 살아오셨는데, 여행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었고 영어를 통해서 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힘차게 열고 계신 것이다.

가습이 벅차오른다.  내가 그 문을 여는데 동기를 제공한 것에 대해 그리고 제대로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내일 아침도, 저녁도 그렇게 매일이 쌓이면 올해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즈음 엄마는 파닉스를 끝내고 

스스로 Christmas를 읽을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은 내게도 무엇보다 큰 선물이 될 것 같다. 




<매주 일요일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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